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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덕규(시인과 촌장) 프로필 나이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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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덕규(시인과 촌장) 프로필 나이 아내(부인) 딸 근황

 

<불후의 명곡 하덕규>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4월 10일 불후의 명곡에 출연한다고 합니다. 

 

 

하덕규는 가시나무, 사랑일기, 한계령 등 많은 사랑을 받는 명곡을 탄생시킨 1980년대 대표 싱어송라이터로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도 불리고 있는데요, 특히 그의 방송 출연은 23년 만이라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하덕규는 KBS를 통해 "모두가 어려운 시기인데 내 노래로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출연 배경을 밝혔는데요, 과연 어떤 무대를 보여줄지 기대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이에 오늘은 하덕규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모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덕규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학력 

-하덕규 부모 집안 과거 어린 시절

-하덕규 음악을 하게 된 계기

-하덕규 시인과 촌장 데뷔 앨범 활동

-하덕규 결혼 아내(부인) 딸 근황


-하덕규(가수)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학력 

 

가수 하덕규는 1958년 7월 21일생으로 올해 나이 64세입니다. 하덕규 고향은 강원도 홍천군이며,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하덕규 현재 가족으로는 아내(부인)와 두 딸이 있습니다. 하덕규 학력은 추계예술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덕규(가수) 부모 집안 과거 어린 시절

 

하덕규는 아주 어렸을 때(2-3살) 속초 근방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열 살까지 자라다가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하덕규의 부모님은 이북(평안도) 출신으로 피난을 내려와 정착을 한 실향민이라고 합니다. 

 

 

하덕규 : "저희는 형제가 9남매였어요. 아버님이 이북에서 형님들 세 명을 데리고 오셨고 여기서 저희 어머니랑 재혼하셔서 6남매가 태어났어요. 9남매 중에 제가 일곱째입니다."

 

하덕규 : "어머니가 초등학교 선생님도 하셨고 굉장히 똑똑한 여성이셨어요. 원래는 어머니께 약혼자가 있었는데 인민군으로 나가서 전사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나라가 분단되는 바람에 포로수용소에 있는 오빠를 찾으러 내려왔다가 못 가게 된 거죠."

 

 

하덕규 : "그래서 유력한 사람을 찾아가서 오빠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어요. 아버지 집에서 머물면서 찾을 때까지 기다려 봐라 했던 것이 불가피하게 가정이 만들어진 거죠. 이렇게 만들어진 가정이 굉장히 많아요. 그 가운데서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거죠"

 

하덕규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양조장을 하셔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면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고 하네요. 누나들도 이미 서울에 와있었고, 하덕규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올라와 누나들과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던 중 하덕규가 12살 정도 되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도시생활을 어렵게 하게 되었고, 하덕규는 그래서 시골에서 행복했던 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 유달리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덕규 : "저는 유달리 고향을 그리워했어요. 그래서 서울이 너무 싫었고 제가 자랐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들이 많이 쌓여서 그런지 대학을 미대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릴 때도, 그 이후에 음악으로 전환을 해서 노래를 할 때도 계속해서 작품에 나타나는 것들은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들이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하덕규(가수) 음악을 하게 된 계기

 

그런데 하덕규는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덕규는 대학도 미대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다가 우연히 아마추어 콘테스트 노래자랑에 나갔다가 1등을 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덕규 :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는데 그때부터 노래를 시작했어요. 아마추어 무대에 서기 시작하다가 유명했던 가수 한 분이 갑자기 방송을 펑크 내는 바람에 FM 라디오(이종환 선생님의 셀부르)에서 대타가 필요했는데 마침 우리밖에 없어서 방송국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하덕규 : "그룹을 만들어서 같이 나갔죠. 처음에는 팝송이 나이라 제가 직접 만든 곡을 불렀어요. 그때 거기 계신 PD 한 분이 눈여겨보다가 레코드 회사를 소개했어요. 그때 방송에서 팀 이름을 물어보는데 얼떨결에 시인과 촌장이라고 대답을 했어요"

 

하덕규 : "계획한 게 아니었고, 다만 마음에 두고 있다가 셋이서 하다가 둘이 하게 됐는데 팀 이름을 못 정하고 있었던 거죠. 같이 노래했던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지금은 노래를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하덕교 : "사실 미대를 다니면서 평론과 작품보다는 이론 쪽에 관심이 많아서 미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국 유학을 가고 싶어서 음반 한 장 내서 돈 벌면 가리라 했는데 첫 음반이 소위 히트가 안 되는 바람에 못 갔어요"

 

 

하덕규 : "그때부터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몇 년 지나면서 결국은 예술이라는 것이 자기표현이고 자기 안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건데 재료의 차이일 뿐이지, 어떻게 보면 음악이 확산력이 강하고 좀 더 대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음악 하는 게 재미있고 고생은 되었지만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죠. 지금은 아내하고 은퇴하면 그림 그리러 시골로 가자고 해요"

 

-하덕규(가수) 시인과 촌장 데뷔 앨범 활동

 

하덕규는 그렇게 1981년 오종수와 함께 듀오를 결선한 뒤 서영은의 단편소설 시인과 촌장을 따와서 팀명을 짓고 1집 시인과 촌장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시를 짓는 시인이 아니라 시장 사람을 뜻한다고 하네요.

 

 

데뷔 이후 하덕규는 1984년 기타리스트 함춘호를 만나 시인과 촌장 2기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6년 2집 푸른 돛을 발표하고 함춘호의 부재중에 1988년 3집 숲을 발매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개인 활동을 하던 하덕규는 1997년 재작업을 선언, 2000년 4집 더 브릿지를 발표합니다. 당시 하덕규의 시인과 촌장의 대표곡으로는 재회, 숲, 꽃을 주고 간 사랑, 한계령, 자유 등이 있으며, 1980년대 대표 싱어송라이터로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중 가시나무, 사랑일기, 충경 등은 광고음악에 쓰이면서 히트를 쳤고, 그중에서도 가시나무는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노래로, 특히 가수 조성모의 리메이크 곡이 큰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하덕규(가수) 결혼 아내(부인) 딸 근황

 

하덕규는 지금의 아내(부인)와 1989년 결혼하여 슬하에 두 딸을 두었는데요, 큰 딸은 30세 정도, 작은 딸은 28세 정도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덕규 아내(부인)와 두 딸에 대해서는 나이 직업 등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하덕규는 결혼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내(부인)와 두 딸이 함께 미국에서 지내고 하덕규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후 44살에 암 판정을 받은 하덕규는 2006년 미국에서 선교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0년 하덕규는 워싱턴 DC에서 목사(개신교 침례회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이자 백석예술대학교 교회 실용음악과 교수로 조용히 지내며, 전국 교회를 돌며 음악을 통해 복음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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