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관련 정보와 상식/연예 스포츠

박재란 <나이 딸 박성신>

728x90

박재란(트로트 가수) <나이 딸 박성신>

 

 

<박재란 프로필 본명 나이 고향 가족 종교 학력 과거 데뷔 및 활동 딸 박성신 사망 근황>


-박재란(트로트 가수), 박재란 프로필 본명 나이 고향 가족 종교 학력

 

박재란은 가수 겸 작사가이며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로, 박재란의 본명은 이영숙이라고 하구요, 

 

박재란의 나이는 1938년 12월 16일생으로 올해 나이 83세입니다. 박재란의 고향은 서울(일제 강점기 경성부)이며, 가족으로는 남편 박운양이 있었는데 현재 이혼 상태라고 하구요, 

 

 

 

박재란의 형제로는 언니 4명과 오짜 1명과 우리동생 1명, 아버지 이수천(오르가니스트로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함), 어머니 유순남(개신교회 성다대원), 자녀로는 첫째 딸 박성은, 둘째딸 박성신이 있는데요, 

 

 

박재란의 둘째 딸 박성신은 1968년생으로 198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가창력을 수상하였고 이듬해 1989년 한 번만 더 라는 노래 작품으로 공정 히느를 거둔 가수이기도 하답니다. 

 

 

박재란 종교는 개신교라고 하구요, 박재란 학력은 충청남도 천안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는 천안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재란(트로트 가수), 박재란 과거

 

박재란은 과거 한때 경기도 인천 제물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박재란은 아직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1941년(4세 시절) 일가족과 함께 충청남도 천안에 이주하면서 이후 그곳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가수 박재란은 나이 10살 때인 1947년에 부친상을 치렀으며, 1953년 자신의 본명인 이영숙이라는 이름으로 주한 미 8군 무대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가수로 첫 데뷔를 했답니다. 

 

 

이후 박재란은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로 모시고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김광수를 사숙으로 모시며 박태준의 문하에서 음악 수련을 하며 박태준에게서 박재란이라는 예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박재란(트로트 가수), 박재란 가수 데뷔 및 활동

 

가수 박재란은 이후 19587년 정식 가수로 데뷔했으며, 이후 뜰 아래 귀뚜라미, 럭키 모닝, 코스모스 사랑,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 등을 비롯한 여러 노래들이 히트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58년에는 파인 김동환 시에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김동현이 작곡한 산 너머 남촌에는 을 불러 연이은 히트를 기록했으며, 또한 박재란은 이듬해 1959년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의 단역 출연을 통하여 영화배우로도 데뷔를 했답니다. 

 

박재란은 같은 해 1959년 당시 미국 가수 겸 기타리스트 및 작가가 겸 영화배우 벌 아이브스가 미국 시인 겸 라디오 MC였던 웨블리 에드워즈와 공동으로 영어 가사로 작사하고, 작곡한 피얼리 쉘즈 라는 작품을 작사가 전우가 한국어 가사로써 번안 작사하고 박춘석이 편곡한 진주 조개잡이 하는 노래를 받아 불렀는데요, 

 

 

이 노래 작품은 국내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여름 애창 노래 가운데 인기 애창 번안곡에 손꼽히는 노래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시키며 일찌감치 국민가수 반열에 오른 박재란은 당시 박재란이 착용하는 미니스커트, 유리구두 등 패션 아이템이 매번 화제가 되었고, 패션 디자이너 고 앙드레 김에게 의상을 선물 받으며 그의 뮤즈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박재란은 인터뷰를 통해 과거 생전 앙드레 김이 박재란 씨 옷을 해서 입히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 라고 했다며 앙드레 김과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박재란 결혼 전남편 이혼 이혼이유

 

박재란은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돌연 결혼을 발표했는데요, 하지만 박재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박재란은 지난 2월 인생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전남편과의 결혼생활에 대해 "둘이 달콤하게 연애했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내가 너무 바쁘게 일하다 보니 부부지간에 다정한 만남, 외식 등을 하지 못했다"고 입을 열었습니다. 

 

 

이어 박재란은 "나는 돈만 벌 줄 알았다. 남편에게 결혼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밥을 해준 적이 없다."며 "전남편이 사업했는데 내가 벌어놓은 돈이 사라졌다"며 "워낙 빚을 많이 졌고, 사업하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내 돈으로도 빚을 다 갚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박재란은 "갈현동 구석 전셋집으로도 이사 갔었다. 집 두 채 다 팔아먹었다"며 "그래도 두 딸이 있으니까 가정을 지키려고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박재란은 "그 당시 명동에 있던 다방 마담과 전남편이 홍콩으로 도망가려고 비자까지 다 받아놨더라"라며 "그때 이혼을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박재란은 "안 되겠다. 너를 내가 남편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다 고 생각했다"며 "전남편하고 이혼할 때 내가 피해 다녔다. 전남편이 이혼을 안 해주려고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가수 한명숙 집에 숨어 있던 박재란은 "남편이 나는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하늘이 두쪽이 나도 네 마음은 변치 않았을 거야 라고 말했다"라고 회상했는데요, 이에 박재란은 전남편에게 "하늘이 두 쪽 나도 변치 않을 사람이 변했을 때는 끝난 거야 가 라고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었다"고 전했습니다. 

 

 

박재란은 "여자가 당시 이혼한다는 건 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울증이 왔었고, 미국에 갈 두 밖에 없었다. 도저히 한국에서 살 수 없었다. 남에게 사기로 당했다. 제가 너무 상처가 커서 한국에 머물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박재란은 그렇게 첫남편과 13년 만에 이혼한 박재란은 이혼의 아픔을 잊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하고 미국 길에 오르며 새 출발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재란은 전남편의 반대로 딸 둘을 한국에 남겨두고 낯선 타지에서 혼자서 생활을 했다고 하네요. 

 

박재란은 "두 딸을 두고 먼저 미국으로 떠났었다. 이후 내 여건과 아이들 아빠 때문에 15년 이상 만나지 못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어 박재란은 "미국에서 신문으로 딸인 박성신이 가수로 데뷔했다는 소식을 접했다"며 "미국 생활 당시 떳떳하게 딸들을 만나서 오고 싶었지만 상황이 안 좋았다"고 밝혔습니다. 

 

 

박재란은 도망치듯 건너간 미국에서 10살 연하의 한인 남성과 재혼했지만 5년 만에 다시 한 번 이혼을 택했다고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친한 지인에게 레스토랑 사업을 제안받고 억대 사기를 당해 10억을 날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박재란은 "세상 사람들 말씀한다. 참 팔자 세다고, 그게 바로 나다. 수갑도 찼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펑펑 울어도 시원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박재란은 불법체류자로 열흘 정도 수감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박재란은 미국에서 되는 것이 없고 살면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죽으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고 하네요. 

 

 

박재란 :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 한인 사회에서 노래하며 돈을 벌었다. 행사가 많았다. 당시 행사비가 우리나라 돈으로 최소 1000만원 정도였다. 두 번, 세 번 사기를 당했다. 세상을 잘 몰라 사람을 잘 믿었다. 다 진심이라고 생각했다가 큰 실패를 겪었다"

 

 

박재란 : "영주권이 없어 불법채류를 하면서 험난하게 살았다. 추방당할 위기였다. 이러한 한계가 있었고 결국 유치장까지 갔다. 나를 좋아하는 연하의 남성과 라스베이거스로 가 결혼을 해 영주권을 취득했다. 두번의 결혼 실패를 하기는 정말 싫어 노력했다"

 

박재란 : "이 양반이 친구를 잘못 만나서 아편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집에 안 들어오고 행방불명이 됐다. 나중에는 집에도 안 들어오더라. 어디선가 어떻게 사는 줄도 몰랐다.그래서 자동 이혼이 됐다"

 

 

박재란 : "몇 번씩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바닷가에 나갔다. 신발까지 벗었다. 그런데 내가 이대로 죽으면 가족과 딸들을 어쩌나 싶었고, 다시 일어나 보자고 마음먹었다"

 

-박재란(트로트 가수), 박재란 딸 박성신

 

한편 박재란을 많이 닮았다는 딸 박성신은 "엄마처럼 훌륭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지난 2014년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말았는데요, 박재란은 지난 2월 12일 방송된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 딸인 고 박성신의 죽음에 대해 "연예인 생활하면서 돈은 벌어야겠고 임신한 걸 모르게 하려고 복대를 차고 다녔다."

 

 

"그런데 그걸 너무 꽁꽁 묶어서 아이가 그걸 못 견디고 조산했다. 그래서 인큐베이터에서 석 달 있었는데 애가 모든 기관이 다 약하다. 운동을 해도 안 됐다.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혀 보는 이들을 눈물 짓게 했습니다.

 

박재란은 또 이날 방송에서 이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생이별한 딸 박성신의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했다고 밝히며 "한국에 돌아온 뒤 연결이 돼 만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박재란은 "대전에서 사위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쓰러져서 사망했다고 하더라. 장례식장에 있던 딸의 영정사진 앞에서 기절했다"라고 박성신 사망 비보를 접했던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박재란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후였다. 사위가 내 상태를 알고 딸의 묘지를 안 알려줬다. 딸의 마지막 순간을 하지 못했다"라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박재란은 이어 "한 번은 비가 쏟아지는데, 딸이 너무 보고 싶더라. 차 운전대를 잡고 딸의 이름을 불렀다"라며 딸을 향한 그리움과 애통한 마음을 밝혔습니다. 

 

 

 

-박재란의 딸 고 박성신

 

박재란의 딸이자 90년대 인기곡 한번만 더를 부른 가수 고 박성신은 1968년생으로 가수 박재란의 둘째 딸입니다. 박재란의 딸 고 박성신은 서울예술전문대학 재학 중이던 1987년 제 1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회상으로 입상하며 대중에 첫 선을 보였는데요, 

 

 

 

이후 그는 이듬해 MBC 강변가요제에서 비오는 오후로 가창상과 장려상을 받으며 실력과 인기를 입증했습니다. 이후 1989년 1집 한번만 더 가 공전의 히트를 쳤으며 1991년 크림 하나 설탕 하나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2집 발표 후 연예 활동을 사실상 중단했던 박성신은 2014년 8월 심장질환으로 사망하게 되었는데요, 향년 45세였습니다. 

 

-박재란(트로트 가수), 박재란 근황

 

박재란은 현미, 한명숙 등 1960년대 여가수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인물인데요, 결혼과 이혼 등으로 연예계와 자연스럽게 멀어졌었는데요, 이후 2017년 꼴찌면 어때서 노래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답니다. 

 

* 추천 글 -> 김국환 <나이 과거 부인(아내) 아들 딸>

* 추천 글 -> 장보윤(가수) 나이, 누구?<트롯신이 떴다2>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