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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환 <아내(부인) 정윤선 나이(차)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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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환<아내(부인) 정윤선 나이(차) 과거 딸 아들 집>



<스타다큐 마이웨이 정동환 아내(부인) 정윤선>



배우 정동환이 10월 19일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그와 함께 그의 아내(부인) 정윤선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 배우 정동환의 이야기가 그려졌는데요, 장르를 가리지 않는 명품 연기로, 대체불가 배우로 불리는 정동환이 50년 연기 인생은 물론 아내와의 러브스토리, 딸과 아들을 공개하며 무대 아래 일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정동환은 오는 22일 공연되는 모노드라마, 연극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준비로 한창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번 연극에서 1인 4역을 소화해야 하는 심도 있는 연기에 도전한다고 하는데요, 이번 연극에 도전한 이유로 정동환은 "데뷔 50년, 나이 70이 넘어선 스스로에 대한 또 다른 도전" 이라고 말합니다. 



절친한 후배 배우 서이숙이 정동환을 응원하기 위해 연습실에 방문했는데요, 서이숙은 그의 연기에 또 한 번 깊은 감명을 받으며 "배우의 길에서 방황할 때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다"면서 "전동환은 연기 인생의 영웅!"이라는 말로 존경심을 나타냈습니다. 


명품 배우 정동환의 뒤에는 묵묵히 내조에 힘써온 아내가 있었습니다. 정동환의 아내는 1979년 잊지는 못할거야, 엽서 등의 노래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정윤선입니다. 정윤선은 "방송 출연이 진짜 오래간만이기 때문에 어색하다"며 



이어 정윤선은 "10년 정도 된 것 같고 노래 안 한지는 결혼하면서붜터 그만뒀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정윤선은 MBC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배우로도 활동했었는데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정윤선은 "그건 너무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정동환은 아내 정윤선을 감싸주려 했지만 정윤선은 "너무 못하니까 대사가 하나도 없더라"며 "되게 재밌는 캐릭터인데 내가 다 망쳤다"고 고백했습니다. 정윤선은 결혼과 함께 은퇴를 선언하며 정동환의 내조에 힘써왔습니다. 



"무대가 그립지 않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그녀는 "처음에는 그리웠지만 세월과 함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며 40년 전 날들을 회상했습니다. 아내 뿐 아니라 도예가로서 아버지처럼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딸과의 깊고 짙은 이야기도 공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오늘은 정동환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그의 연기에 대한 열정, 그리고 결혼와 이혼 그리고 재혼 현재 근황 등 다양한 정보들을 모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동환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종교 학력 데뷔 및 활동 출연 작품 과거 인생사 드라마 데뷔 이후 스캔들, 이혼, 미국유학, 아내(부인) 정윤선 나이(차) 결혼, 결혼스토리, 집(전원주택), 정윤선 암 말기 오진, 공황장애, 딸, 아들>



-정동환(배우), 정동환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종교 학력 


배우 정동환의 나이는 1949년 8월 5일생으로 올해 나이 72세입니다. 정동환의 고향은 전라북도 김재군(현 김재시)이며, 정동환 가족으로는 부인(아내) 정윤선이 있습니다. 정동환의 종교는 개신교라고 하구요, 정동환의 학력은 중동고등학교,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동환(배우), 정동환 데뷔 및 활동 출연 작품 


정동환은 1969년 연극 낯선 사나이로 데뷔, 극단 동랑레파토리에서 활동합니다. 정동환은 연극 햄릿, 고곤의 선물 맥베스 등 수많은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82년 영화 만추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후 정동환은 영화 블루 하트, 두 여자 이야기, 박수칠 때 떠나라와 드라마 초원에 뜨는 별, 찬란한 여명, 제국의 아침, 연개소문, 대왕 세종, 대왕의 꿈, 나인, 상속자들, 너희들은 포위됐다 등에서 좋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정동환은 또렷한 목소리와 중후한 외모를 살려 높으신 분들 역할에 특화된 배우로 알려져 있는데요, 귀티 나는 이미지의 소유자로 극중에서 주로 부유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정동환은 특유의 인자한 인상으로 선역, 소시민 역할을 많이 맡기도 하는데요, 주로 악역을 많이 맡아서 그렇지 사실 연기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 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동환은 여전히 연극배우로도 유명한데요, 2009년 명동 예술극장 재개관식에도 연극배우 자격으로 참석한 바 있으며, 레이디 맥배스, 고곤의 선물, 단테의 신곡, 오이디푸스 등 다양한 연극에도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매녀 최소 1-2편의 굵직한 연극에 꼬박꼬박 출연하는 다작 배우이기도 합니다. 



정동환은 지난해(2019년) KBS 연기대상에서 연작 단막극상을 수상했는데요, 수상소감 때는 요즘 드라마계가 돈에 매몰된 경향을 안타까워 하면서 KBS 드라마 정책을 칭찬하는 취지의 말을 남겼습니다. 


-정동환(배우), 정동환 과거, 인생사


행상을 하며 두 아들을 키우는 가난한 어머니의 둘째 아들(아버지는 따로 살았다고 하네요)이었던 정동환, 그는 당시 이름대면 알 만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차남인 그까지 고교에 진학하겠다고 감히 말하기 힘든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동환은 불행히도 고교 입시에 실패하게 됩니다. 공부를 잘해 수재 소리를 듣던 형과는 달리 매사 그렇게 실패만 하던 별 볼일 없는 아들이었다고 그는 당시의 자신을 회상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해 정동환은 "제 삶은 가난을 이고 태어난 가난이 두렵지 않았던 삶이었어요. 고교 입시에 실패해서 재수를 해야 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할 말이 없었죠"라고 하며



이어 정동환은 "당시에 공부할 곳이나 있나요? 가방을 들고 하릴없이 시립도서관에 가던 길에 드라마센터 앞을 지나가다가 그냥 홀린 듯이 연극을 보러 들어간 거예요. 당시 중동고등학교 연극부 학생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연극이란 세계를 처음 발견했어요. 그게 그만 내 인생을 결정해버린 거죠"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정동환은 중동고에 지원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정동환은 고교 1학년 때인 1965년 연극 일출로 전국남녀 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당시 이 대회의 주관자가 우리나라 연극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유치진이었고, 그는 그 거물에게 연극계의 재목감으로 눈도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정동환은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서울연극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됩니다. 



정동환 :"연극도 열심히 했지만 대학 갈 욕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교 떨어진 거예요. 한 대학 철학과에 지원했는데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말았죠. 그래서 서울연극학교에 계신 유치진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정동환 : "나 학비가 없는데 학교는 다니고 싶다. 집안 형편상 재수도 할 수 없고, 이름 있는 대학이 아닌 이상 학비를 대달라고 말할 명분도 없다. 그렇게 간절히 사정을 털어놓았죠"



정동환 : "유치진 선생님은 저에게 무대감독 일을 하는 조건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게 해주었어요. 저는 나무토막 하나까지 내 손으로 다듬어 세우게 되면서 무대는 나에게 더욱 특별한 공간이 되었어요."


그리고 곧 그는 군대에 가게 됩니다. 그가 군대에 간 사이 "한 학생이 전액 장학금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작게 나눠 가급적 많은 학생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며 전액 장학생 제도가 폐지됐다. 또 한 번 시련이 닥친것입니다. 


정동환 : "난 참 운이 좋았어요. 그때 월남 파병을 갈 수 있었거든요. 어차피 군대 마치고 돌아가봐야 학교로 돌아가지도 못할 텐데 돈이나 벌어오자. 싶어서 월남행을 자원한 거죠. 보통 월남은 12개월밖에 있을 수 없는데 마침 내가 갔을 때가 패망 직전이어서 18개월이나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제대를 넘겨서까지 있다가 73년에 돌아왔죠. 월남에서 나는 땅 파고 지뢰 제거하고 다리 놨어요. 야전 공병이었죠"



이후 정동환은 1969년 연극 낯선 사나이로 정식 데뷔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정동환은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연극배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신 정동환은 1973년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동아방송 성우에 합격, 1년간 성우로 일하다 연기를 하기 위해 사직하게 됩니다. 



정동환 : "베트남에서 돌아와서도 밥벌이가 급했으니까요. 1973년에 동아방송 성우 6기생으로 입사했죠. 처음엔 합격할 거라고 별로 기대도 안 했어요. 딱 한 명 뽑는데 1000명쯤 지원자가 몰렸으니까요"


정동환 : "그런데 그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겨우 1년쯤 다니고 그만뒀어요. 조직생활이 생리에 안 맞았으니까. 직장에 몸 담은 상태에서 연극을 계속하는 것도 어려웠죠. 사실 회사 통틀어서 청바지 입고 다니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가 튀려고 그런게 아니고 당시 나는 양복 한 벌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내가 한 대학 연극부 연출을 도와줬는데 회사 다니면서 바깥 일 한다고 주의도 받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냥 그만둬버렸죠"


그리고 이후 1974년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연극학교에 가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돈을 벌고 연극 무대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동환 : "일본에 가서 계절노동 같은 걸 했어요. 파인애플 따는 일도 하고, 공장 가서 잡부로 일하기도 하고, 오키나와에 가서 사탕수수밭 노동자로일하기도 했죠. 밀항은 아니고 시험 보고 정식비자 받아 갔어요"


"지금 동남아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와서 한 달 일하면 일년치 월급 벌어간다고 하지 않아요? 그것하고 마찬가지였어요. 일본 가서 한철 일하고 돌아오면 수입이 괜찮았거든요"



정동환 : "그렇게 몇 달 일해서 돈을 좀 만지면 귀국해서 또 연극하고 ... 1975년에 공연했던 연극 마의태자 는 흥행도 괜찮았고 배우로서의 제 존재감도 어느 정도 확인시켜준 작품인데, 그래도 먹고사는 문제가 여전히 안 풀려요. 오키나와에 또 갔죠. 사탕수수 농업이 당시 일본의 국책사업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그런데 일이 하도 거칠고 힘드니까, 일본인들은 그 일을 안 하려 했죠. 덕분에 저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기서 일할 수 있었어요"


정동환은 이후 1975년 한국으로 돌아와 마의태자 등의 연극에 출연하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려 다시 일본 사탕수수 농장으로 건너가 외국인 노동자로 일했다고 합니다. 



-정동환(배우), 정동환 드라마 데뷔와 치명적인 실수 스캔들


그러다가 정동환은 1981년 드라마 약속의 땅, 1982년 영화 만추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브라운관에 데뷔합니다. 가난했던 그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데, 그는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합니다. 




당시 정동환은 결혼한 유부남이었는데, 동료 연예인이었던 김윤미와 바람이 난 것입니다. 당시 김윤미는 1977년부터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여자의 얼굴, 약속의 땅에 출연했던 여배우입니다. 



정동환 아내의 간통죄 고소로 사회적인 이슈가 되자, 방송국에서는 정동환과 김윤미에 대해서 무기한 출연정지를 내립니다. 이후 정동환과 김윤미는 약 1년 7개월 뒤에 방송출연 정지가 해제되고 김윤미는 드라마 아버지로 재기하는데 얼마 활동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됩니다. 


-정동환(배우), 정동환 전부인(아내)과 이혼


사실 전동환과 전처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보다는 가난이 원인이었던 것인데요, 결국 정동환과 전부인은 1982년 이혼을 하고, 간통죄 재판이 실질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정동환(배우), 정동환 미국유학


결국 앞길이 막힌 정동환은 미국 유학을 떠납니다. 당시 그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 딸이 2명이 있었는데, 모두 어머니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죠. 정동환 둘째 딸 이름은 정하늬인데요, 1980년생이고 직업은 연극배우라고 하네요. 


정동환 : "LA공항에서 저를 픽업한 친구가 청소용역업을 했어요. 자연스럽게 저도 그 일을 하게 됐죠. 아무 기술 없어도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당시 제가 다녔던 학교가 리 스트라스버그 시어터 인스티튜트였는데,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빌딩 청소를 했지요. 그런데 그 일이 나한테 참 잘 맞더라고요, 밤에 빌딩 한 층을 맡아서 혼자 청소하면 되니까, 사람들하고 번잡하게 엮이지 않아서 좋더라고요"



어쨌든 자신의 잘못으로 시작한 반강제적인 미국 유학생활이지만, 정동환은 충실하게 보냅니다. 정동환은 그렇게 빌딩청소로 학비를 마련하고, 헐리우드 YMCA에서 보디트레이닝으로 심신을 단련합니다. 



또한 귀국전 맨해턴에서 440여일간 50여편의 연극을 관람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후일 그의 연기 인생의 밑거름이 되었죠. 그리고 1985년 귀국해서 다시 연기 생활을 시작합니다. 


-정동환 아내(부인) 정윤선과 만남과 결혼, 정윤선 나이 학력 데뷔 활동 히트곡


그런데 귀국하기 전인 1985년 9월 미국에서 친구 소개로 가수 정윤선을 만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정동환은 "정윤선이 그때 미국에 공연이 있었어요. LA에서 후배가 있었는데 만나게 되었죠."라고 말했습니다. 



정동환 아내(부인) 정윤선은 1958년생으로 올해 나이 63세라고 하구요, 정동환과 나이차는 1949년생(72세)인 정동환보다 9살 연하라고 합니다.  정윤선의 학력은 숙명여고와 메릴랜드 주립대 분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윤선은 사실 13살때 박혜령이 부른 검은고양이 네로에서 코러스로 활동하기도 했는데요, 이후 1976년 MBC 탤런트 9기로 데뷔했었다고 하네요.그러다가 정윤선은 1978년 잊지는 못할거야 로 가요계로 진로를 변경, 아들, 엽서, 오해 등의 히트곡을 남깁니다. 




정윤선은 MBC 10대가수상 시상식에서 여자신인상을 수상하며 최고 인기 가수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는데요, 미모와 가창력을 겸비한 정윤선은 그 당시 원조 요정 군대 여신으로 각광을 받을 정도였고, 또한 노래 실력에 출중한 외모까지 각종 화보 모델 섭외 1순위였을 정도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윤선은 매니저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로 상심이 커진 나머지, 활동을 중단했는데요, 그런 다음 1986년 2월 정동환과 약혼을 했고 같은 해 9월 결혼을 하면서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정윤선은 과거 자신이 은퇴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윤선은 과거 2011년 은퇴 후 25년간 얼굴을 비추지 않다가 갑자기 TV에 얼굴을 비춘 이후 간간이 정동환과 함께 방송을 통해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었는데요, 정윤선이 그렇게 오랜만에 다시 방송에 얼굴을 비추게 된 이유는 세간의 억측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정윤성은 "나는 연예계에서 은퇴를 한 사람이었기에 노출이 싫었다"고 하며, 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와도 늘 뒤에 있었고,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지속되니 정동환이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졌냐?라는 사람들의 억측이 나돌았다"


때문에 정윤선은 아직 활발히 활동을 하는 남편을 위해 큰 마음 먹고 브라운관에 나섰다고 합니다. 정윤선은 "일보다는 화목한 부부관계를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일을 과감히 포기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이날 정윤선은 은퇴 이유에 대해 "갑자기 가수 생활이 싫어졌다. 당시 매니저가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하고 노래는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해 갑작스레 그만두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사실 무대가 그리웠다. 은퇴 후 같은 또래 가수들이 나오는 가요프로그램과 연말 시상식도 한 7년 정도는 보지 않았다"고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윤선의 그러한 마음도 "세월과 함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고 합니다. 


-정동환 아내(부인) 정윤선 딸 아들


정동환과 정윤선은 2녀 1남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요,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전부인(아내)에게서 낳은 아이들이고, 터울이 많이 나는 아들은 정동환과 정윤선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고 합니다. 정윤선은 가수 생활을 접고 첫째 딸과 둘째 딸을 정성껏 기르면서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요, 아들 이름은 정우철이라고 합니다. 



정동환의 첫째 딸은 도예가로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구요, 정동환의 둘째 딸, 정하늬는 정동환에 이어 연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하늬는 꿈을 위해 부모님의 만류에도 연극 생활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요, 결국 지금은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는 연극배우가 되었다고 합니다. 몇 년전에는 결혼식 모습이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었습니다.



-정동환 정윤선 집(전원주택) 이사 이유, 이후 생활


아뭇튼 정동환과 아내(부인) 정윤선은 결혼 이후 서울이 몸에 맞지가 않아 결국 경기도 광주 초월읍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종이비행기 모양의 목조주택으로 2001년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이사를 반대했던 아내(부인)였지만 이내 그곳에 정착해 동네 할머니들 따라다니며 채취한 들판의 자연재료로 무침 등을 만들어 주는 등 빠르게 적응해나갔다고 합니다. 



정동환 "저는 서울이 내 몸에 맞지 않았어요. 그래 어찌어찌하여 길조차 없는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죠. 서울내기 아내가 반대했죠. 한데 여자들은 놀라운 힘을 발휘해요. 일단 마음을 두더니 시골아낙으로 모드전환이에요. 동네 할머니들 따라 다니며 채취한 들판의 자연재료로 새로운 무침을 만들어 저를 먹였으니까요. 산을 헤매고 다녀 제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정동환 아내(부인) 정윤선 웰빙음식 선호 이유, 암 말기 선고 오진


웰빙 음식에 꽂힌 예쁜 아내가 산 속을 헤매니 걱정했을 만도 한데요, 이어 정동환은 조심스럽게 아내가 말기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얘기를 꺼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민감한 스타의 어려운 첫 고백이었는데요, 그 자리에 정윤선은 없었습니다. 



정동환 : "하나님이 한 번 더 생명을 주신 겁니다"


2002년 한 일 월드컵 개최를 기념하는 연예인 자선행사에 참여하고 일본에서 돌아온 날이었다고 하는데요, 아내 전화를 받고 병원에 급히 달려갔더니 의사가 "너무 늦었어요. 왜 이제 왔어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암 덩어리가 너무 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정동환 : "열어봤자 수술이 소용없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멍해졌지요. 내가 연극배우인데 아내에게 뭐라고 말하지. 난 지금 공연하러 가야 하는데..."



정동환은 결국 공연을 포기하고 그날 이후 미친 듯이 아내를 위해 뛰게 됩니다. 주먹만한 혹 제거 수술을 감행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인데요, 한데 혹을 떼어내 조직검사를 해보니 암이 아니었다고 하네요. 그저 혹이었던 셈. 명백한 오진이었다고 합니다. 


정동환 :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아내는 암 환자였어요. 병원에서 암이라니까 암 환자처럼 정말 신체가 까맣게 변하더라고요, 그때 포기했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어이가 없었죠. 주변에서 소송하자는 거 말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을 못하겠더라고요.


-정동환 공황장애 앓은 경험


그런데 정동환은 그렇게 전원주택에 살면서 연기 생활을 계속하던 중 뜻밖에도 공황장애를 앓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동환은 "갑자기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았어요. 심장이 가빠지고 가만있으면 넘어질 것 같아서 의자에 앉을 때 발을 의자다리에 걸고 앉아 있었죠" 



"그래도 내 몸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누가 나한테 배역을 주려고 하겠어요. 내가 하고픈 작품이 막 무대에 올려지는 판인데, 그걸 하고픈데 그렇게 쓰러지면 어떻게 하겠어요? 숨기고 버텼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동환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합니다. 사는 곳인 경기도 광주에서 드라마 촬영장까지 차를 몰로 가다가 어지럼증이나 숨막히는 증세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정동환은 비싼 보약이란 것도 먹어보고 이곳저곳 종합병원도 찾아봤지만 뾰족한 해법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점점 체력이 고갈되던 터라 경기도 광주에 살던 그는 광화문 인근으로 이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동선이라도 줄여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고 하네요. 그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 작은 개인병원을 찾았는데 거기서 준 알약이 그를 구원해내게 됩니다.


정동환 : "몇 십만원짜리 보약으로도 안 됐어요. 그런데 그 동네 병원에서 처방해준 백 몇십원 하는 알약을 먹으니까 이게 효과가 있어요. 살겠다, 싶더라고요"


정동환은 지난해 해피투게더에서도 공황장애를 겪었던 일에 대해 털어놨는데요, 정동환은 "한동안 공황장애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나 혼자 같은 착각이 들면서 객석이 멀어지더라"라며 "너무 공포스러웠다. 내가 조금만 의지가 되어도 정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게 없어지면 다시 시작된다"라고 했습니다. 






정동환은 또 "드라마, 영화, 연극으로 활동하던 중 그런 상태가 1년 넘게 갔다. 병원을 찾아 약을 먹으니 회복됐다"라며 "일본 공연 가던 중에 그걸 깜빡 놓고 간 거다. 정말 죽을 것 같더라. 다행히 다른 배우분이 약봉지를 주셨는데 거기에 내가 먹는 약이 있었다. 그걸 먹고 무사히 무대를 할 수 있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이후 정동환은 어떤 정신과 병원의 진료와 치료로 공황장애를 극복하게 되는데요, 너무 쉬지 않고 몰아쳐서 생긴 병, 무리해서 생긴 병일 것이라고 하네요.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 못 견디는 스타일이라 너무 무리했을 뿐이라고 했는데요, 


실제로 정동환은 결혼 이후 TV와 영화, 연극을 오가며 하루도 쉴 틈 없이 살아왔다고 합니다. 밤새워 방송 촬영을 마친 뒤 바로 연극무대에 뛰어올라가 거침없이 긴 대사를 토했고, 다시 아무 휴식 없이 지인들과 어울려 산을 오르기도 하며, 휴식이라곤 몰랐다고 합니다. 잠시라도 쉬면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버릴 것 같았는지,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고 하네요. 


또한 거기에 당시 정동환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중학생 딸과 어린 아들까지 있었으니 심적 부담이 컸을 거 같습니다. 



정동환은 또한 과거 연극 무대에 자주 섰기에 생활고를 겪었다고 하는데요, 정윤선은 "연극 무대를 하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갖다 쓰는 거다. 알뜰하게 살지 않으면 힘들다." 이어 정동환은 "젊은 애들이 뮤지컬 무대 한 회 서는 게 내가 한 달 받는 연극 출연료보다 더 많이 받는지도 모른다. 관계 없다. 그 인생은 그 인생대로, 나는 나대로 존중하니까"



"하지만 이런 내가 있기까지는 아내가 있었다. 오늘날의 내 8할을 만든 사람이 아내가. 아내를 날개 없는 천사라고 한다. 기름값이 없던 시절도 있었다. 버스 탁 다녔다. 버스 타고 연극 가면 이 사람이 데리러 오고, 그것 때문에 힘들게 연극 했던 시절을 기억한다"고 털어놨습니다. 


-정동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정동환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정동환 : "감히 나 같은 속인이 추기경님을 빗대 내 삶을 이야기했다는 게 불손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있어요. 며칠 전에 정채봉씨가 쓴 바보 별님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걸 읽다 보니 정말 기가 막힌 거야. 이분의 삶도 나하고 다를 바 없었구나. 다른 것이 있었다면 추기경님은 고비 때마다 그 관문을 다 넘었고, 나는 내 인생의 고비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 그 실패가 쌓이고 쌓여서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의 나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이 오더라고요"


정동환 : "난 연극에서 길을 찾은 거예요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태어난 가정 환경은 비슷했지만 살아온 내력을 보면 서로가 정반대의 길을 걸었어. 그분은 끊임없이 성공을 거쳐 종교 속에서 길을 찾았고 나는 실패가 쌓이고 쌓여 이 길로 왔어"



"연극무대를 볼 때마다 짝사랑하던 그녀를 볼 때처럼 가슴이 설레고 떨렸지만, 그것이 뭔지 몰라 두렵고 안타까울 뿐이었지. 수많은 실패와 좌적 속에서 번민했을 뿐이고, 무대를 떠나지 못했을 뿐이야."


"돌아보면 단 한 번만 그 길이 어긋났어도 나는 여기에 있지 않았을 거야.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날 이곳으로 흘러오게 한 거야. 그런데! 그런데 그 모든 우연과 운명적인 상황들이 맞물려 한 세상이 지났을 때. 그 끝에서 만난 세계는 김수환 추기경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운명이고 신념이고, 그게 바로 연극이지. 연극은 바로 종교야!


그리고 그는 곧 그에게 연극사을 안겨준 고곤의 선물의 대사를 읊조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동환 : "신념? 당연히 연극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종교다. ..당신들 속에 감춰진 섬광을 연극을 통해 보게 될 거다!" 그리고 정동환은 왜 이 대사를 인용했는지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오래도록 찾았지만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극작가가 피터 쉐퍼를 통해 드디어 내가 찾아낸 바로 그 말이다"라고. 나이 70이 넘어서도 식지 않는 그의 연기에 대한 열정에 응원과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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