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주 윤동주, 젊은시절, 아버지, 윤동주 별 헤는 밤 콘서트, 근황
< 윤형주 윤동주, 윤동주 별 헤는 밤 콘서트 >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수 윤형주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데요, 윤형주는 시인 윤동주와 시인 겸 건축학자 윤일주의 6촌 동생이라고 합니다
가수 윤동주는 8월 15일 방송된 KBS 2TV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별 헤는 밤'에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날 방송은 윤동주의 시와 삶을 음악,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재해석한 무대로 이적, 스윗소로우, 다이나믹듀오, YB 등이 함께 하는 무대였습니다. .
< 윤형주 윤동주, 윤형주 나이 고향 학력 >
윤형주는 1947년생으로 올해로 만 71입니다. 윤형주는 서울에서 시인 아버지와 성악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했다고 합니다.
또한 윤형주는 공부에도 굉장한 소질을 보였는데요, 윤형주는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 당시에 그는 이미 반에서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특히 시와 운율에 조예가 깊었던 윤형주는 학창 시절부터 다수의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을 하였는데요, 하지만 윤형주는 수험생 시절 1965년 예비 고사를 치룬 후에 그는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질 않았다고 하네요.
윤동주 시인의 뜻을 이어 집안에서는 윤형주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길 바랐으나, 윤형주 본인은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윤형주는 결국 부모님의 설득 끝에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지원한 후, 만약 자신이 본 고사에서 낙방한다면 후기 대학인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여 시인의 길을 걷겠다고 밝히기도 했다는데요, 이후 윤형주는 연세대학교에 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인의 꿈은 접게 되었다고 합니다.
윤형주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1968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학하였으나 1971년 중퇴하였다고 합니다.
< 윤형주 윤동주, 윤형주 가수 데뷔 경력 >
윤형주는 중1 때 영어를 배우면서 고교 졸업 때까지 200곡이 넘는 팝송을 줄줄 외웠고, 대학에 들어가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사주신 기타로 교본을 사서 독학했다고 합니다.
그때 윤형주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교회 고등부 성가대 선배로 후배들 앞에서 근사하게 노래하던 조영남 형이었다고 하는데요, 이후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송창식, 이장희를 만나면서 통기타 문화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윤형주는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등을 발표했고,
윤형주는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짦다란 사연 하나)",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으며,
윤형주는 1971년에는 동아방송 라디오 심야 프로인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윤형주는다시 1973년엔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C를 맡았으며, 1976년과 1978년엔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와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1981년부터 윤형주는 MBC-FM에서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의 MC를 맡았으며, 기독교 방송의 환자와 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인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에서 '윤형주와 함께'의 MC를 지냈습니다.
윤형주는 CM송도 많이 만들었는데, 롯데껌 CM, 새우깡 CM 그리고 롯데월드 테마송 역시 그가 만들었습니다. 또한 윤형주는 2009년에는 부산 도시철도의 로고송을 작사 및 작곡하였으며,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 윤형주와 윤동주, 윤형주 아버지 >
윤형주는 1947년생으로 '쎄시봉 세대' 가수인 윤형주는 윤동주를 생전에 만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917년 중국 북간도(지금의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일대)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일본 유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돼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습니다.
그러나 윤형주 부친인 시인 겸 영문학자 윤영춘 교수가 조카 윤동주와 유대가 각별했다고 하는데요, 부친은 윤동주가 일본 릿쿄(立敎)대학과 도시샤(同志社)대학 재학 시절, 역시 일본에서 유학하며 조카를 보살폈다고 합니다.
윤동주가 옥사하자 윤동주 아버지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러 간 것도 부친이었다고 하는데요,
윤형주는 인터뷰를 통해서 아버지와 윤동주의 관계에 대해서 "아버지께 윤동주는 그저 조카가 아니었어요. 룽징에선 아버지가 선생일 때 제자였고, 학교 선후배였고, 문학적인 부분에선 지기(知己)였죠. 아버지도 일본에서 체포됐다가 나와 두 분은 조국을 잃은 민족의 서러움을 공감하고 나눴던 동지였죠."라고 말했습니다.
윤형주는 "아버지는 동주 형님을 고향에 묻은 뒤 일본말을 쓰지 않았다"며 "부모님이 동주 형님이 죽은 것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을 내게 유산으로 남겨주셨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윤형주는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불거진 양국의 갈등을 바라보는 심정은 남다르다고 하네요.
윤형주는 "요즘 두 나라 관계를 보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에 윤동주가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며 "일본이 조금 더 사랑이 있는 민족이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28년 짧은 생을 산 윤동주는 중국에서 나고 자랐고 일본 유학으로 조국 땅에서 지낸 기간이 5년뿐인데도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증조부(윤재옥)가 1880년대 말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한 집안인데, 한민족이 마을(명동촌)을 이뤘고 그곳에 캐나다 선교사들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 특히 윤동주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가 정신적인 지도자였는데, 선교사들과 학교와 교회를 세워 그곳에 서양 교육과 기독교 교육이 뿌리내렸다고 합니다.
굉장히 깨어있던 마을이라 할 수 있는데요, 명동촌에는 순수 중국인 자녀도 유학 왔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보면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란 대목이 있는데, 중국 한족 여자아이들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후 나라가 일제강점기에 들어가자 윤동주가 민족의 역사나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됐을 것이라는 것인데요, 거기에 영향을 준 것이 부모님, 선각자로 살던 조상들이 아닐까 짐작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윤형주는 윤동주가 의사가 되라는 집안의 바람 대신 시인이 된 것처럼 연세대 의대에 진학했지만, 음악인이 됐다는 점이 닮았다고 합니다. 진학 즈음 시인의 꿈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윤동주 옥사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있다고 하는데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생체실험 대상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 윤형주 근황 >
윤형주는 국제비영리단체 한국해비타트 이사장으로 국내외 열악한 주거환경에 처한 이웃을 돕고 있다고 합니다. 윤형주의 근황과 계획은 한국해비타트가 창립 25주년을 맞아,
올해도 강원도 산불피해 주민을 위해 13채 이동식 주택을 지원했고, 천안에도 젊은이들 참여로 12채를 지어 열두 가정이 입주했으며, 또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인도에 가서도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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