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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성악가 테너) 프로필 나이 과거 향수 아내(부인)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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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웨이' 성악가 테너 박인수

 

성악가 테너 박인수

 

성악가 박인수가 6월 5일 TV조선 마이웨이에 출연해 그의 음악 인생을 공개합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한국 최초 가요와 클래식의 만남으로 탄생한 국민가요 박인수의 음악 인생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서울대 음대에 입학하여 성악가의 길을 걸은 박인수는 오페라 라보엠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1970년에 오페라 주역으로 초청돼 미국 줄리아드 스쿨과 줄리아드 오페라센터를 거쳐 미국과 캐나다, 남미와 유럽에서 주역 테너로 성공을 거둡니다. 

 

이후 가수 이동원과 함께 향수를 불렀는데 이 노래는 1년 만에 130만 장이 팔리며 흥행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박인수는 "향수는 제 음악 인생을 바꿔 놓은 하나의 계기가 됐다. 당시 1년에 200여 회 공연을 다닐 정도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추억했습니다. 

 

이렇게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순찬치만은 않았던 사연도 방송에서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하기 위해 험난한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부터 플루츠를 전공했던 아내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하며 남편을 뒷바라지한 미국에서의 일화까지 마이웨이에서 진솔하게 전할 예정입니다. 

 

그의 소중한 인연들도 공개됩니다. 박인수와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났지만 이제는 그 인연을 넘어 진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뮤지컬 배우 카이와 만납니다. 또한 박인수는 그가 인정한 차세대 가수인 미스트롯2 전유진을 만나 찐팬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이 밖에도 서울대 선후배 사이로, 오랜만에 만나도 친형제 같은 가수 조영남과 만나 거침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물론 국민가요 향수를 듀엣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박인수(성악가)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학력 

 

성악가 테너 박인수

 

성악가 박인수는 1938년 5월 13일생으로 올해 나이 85세입니다. 박인수 고향은 서울 종로구 내수동이며,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박인수 학력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줄리아드 스쿨 음악학교, 맨해튼 음악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인수(성악가) 집안 부모 과거 

 

성악가 테너 박인수

 

박인수는 어린시절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박인수의 아버지는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서 유학을 했고, 서울시청에서 운수과장, 도시계획과장, 건설과장 등 요직을 거쳤지만, 너무나 청렴해 자식들 학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인수의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했고, 노래를 한 번 시작하면 트로트에서부터 이태리 민요, 오페라 아리아, 가곡에 이르기까지 계속 불렀다고 하며, 어머니는 매우 알뜰했고, 음식 솜씨가 굉장히 좋았다고 합니다. 

 

박인수는 네 살 되던 해에 서울 내수동에서 미아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아리는 집이 몇 채 없었고, 산과 들, 논과 밭만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박인수는 미아리 인근에 살면서 여름에는 붕어와 피라미를 잡으러 다니고, 가을에는 메뚜기를 잡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박인수는 서울돈암초등학교에 진학한 후 책 읽는 걸 굉장히 좋아해, 초등학교 때는 소년지로 나오는 것들은 전부 읽었고, 중학교 땐 세계 명작 시리즈를 거의 다 읽어 웬만한 명작 수준의 책들은 중학교 때 다 뗐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한편으로 초등학교 때는 서울 세검정 일대에서 자두, 배 등 과일을 좌판에서 팔았고, 중학교 때는 경기도 수원에서 조선일보 신문배달을 하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얻어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후 박인수는 중학교에 입학을 한 뒤부터는 럭비부에 들어가고 기계체조도 배우고, 유도부터 수영에 이르기까지 안 배운 종목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싸움 꽤나 한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고 그러다 싸움패인 미아리 오형제파를 결성, 친구들에 의해 두목으로 추대되어 싸움질을 일삼고 다니면서도 마도로스가 되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가니는 것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박인수(성악가) 성악을 하게 된 계기

 

성악가 테너 박인수

 

경동고등학교 다닐 때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음악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학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박인수는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따라 동네 교회엘 다니기 시작하면서 노래 부르는 게 좋아 성가대를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라 고등학교 2학년 말 교회 목사로부터 성악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 마도로스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성악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인수는 바로 음대에 진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야간으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다녔고, 그러면서 당시 대한민국의 3대 테너 중 하나였던 이화예고의 이우근 선생에게서 무료로 성악 레슨을 받게 됩니다. 

 

박인수(성악가) 서울대 음대 입학 이후

 

성악가 테너 박인수

 

이우근 선생은 어린 제자를 받아주었고, 그는 석 달 동안 그에게서 성악 레슨을 받게 되었는데 레슨비는 계란 다섯 꾸러미. 사실상 공짜 수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재능이 특출했던 박인수는 몇 달 뒤에 196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게 됩니다. 

 

이후 박인수는 대학 시절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과 김치가 전부였고, 특별한 날에는 어묵을 먹는 게 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박인수는 봄, 가을 주말마다 중국집 결혼식 하객 행사를 하고 몰래 피로연장에 가서 고기를 먹으면서 영양을 보충하고 성악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도 잠시, 그는 군에 입대했고, 제대한 뒤 학교를 휴학하고 5년 동안 동생과 같이 분식집, 포장마차 등을 하고, 혼자서 노래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박인수 : "제가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부분이 좀 있습니다. 그냥 그때는 그런 일이 하고 싶더라고요. 혼자 소리 연구하고, 득음하려고 애쓰고 지냈습니다. 먹고살자고 시작한 식당은 전부 말아먹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라는 사람은 노래하는 것 말고는 재주가 없더라고요."

 

박인수(성악가) 오페라에 도전

 

성악가 테너 박인수

 

이후 박인수는 대학교 4학년 때인 1967년 국립오페라단에서 마탄의 사수를 올릴 때에 주인공 막스 역을 맡아 학생 신분으로 데뷔하지만 공연 당시 잘하고 싶은 욕심에 발성을 바꾼 게 화근이 되어 오페라 자체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맙니다. 

 

당시 서울 시내 일간지들은 일제히 그를 혹평하였고, 결국 오페라 무대에 서자마자 그는 한국 오페라계에서 매장이 돼버리고 맙니다. 이후 1968년 가을에 입학한지 꼭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다시 오페라에 도전, 1969년, 서울오페라단이 만든 라보엠의 주역을 맡아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게 됩니다. 이후 미국 버펄로음악대학의 한 교수가 공연 녹음테이프를 듣고, 그에게 미국으로 올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버펄로대학은 오페라 파우스트를 준비 중이었는데, 박인수를 주인공으로 낙점한 것이었습니다.

 

박인수 : "한 번 공연해 달라는 제안이었지만 곧장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한 번이 두 번으로 이어지고, 또 장기적으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안고 말입니다."

 

박인수 :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않아 유학을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였는데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단 한번의 기회가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박인수(성악가) 뉴욕에서 프리랜서 성악가로 활동

 

성악가 테너 박인수

 

그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버펄로음악대학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는 학교 측으로부터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받고 미국에 남게 됐습니다. 이듬해에는 명문대이니 뉴욕 줄리아드 음대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는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칼라스 장학생 오디션에 참가, 실력을 인정받아, 오페라 라보엠의 주역으로 뽑혀 오늘날 세계적인 테너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닐 시코프가 박교수와 함께 더블 캐스팅으로 선발됩니다. 

 

하지만 이후 줄리아드 대학의 지휘자가 바뀌면서 그와 닐 시코프 모두 주역에서 밀려납니다. 그는 학교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학교 측은 난처해 하면서도 지휘자의 의견을 존중했다고 합니다. 이에 박인수는 줄리아드 음대를 그만두고 맨해튼 음대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이후 맨해튼 음대 석사과정 학생으로서 라보엠, 리골레토, 토스카, 돈파스콸레 등 대다수 오페라의 주역을 맡게 됩니다. 공부는 뒷전이고 연주하기를 즐겼던 그는 맨해튼 음대 총장의 권유로 프로페셔널 성악가가 됩니다. 

 

박인수 : "미국은 신흥국가이다 보니 유럽에 콤플렉스가 많았고, 유럽의 문화를 돈을 주고 사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제가 활동했던 당시에도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오페라 가수들에게 높은 개런티를 지급했고, 최고의 성악가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박인수 : "독일의 성악가들은 특정 극단에 소속되어 활동하지만, 뉴욕은 철저하게 프리랜서로 활동합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은 매일 놀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성악가 중에 웨이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박인수 교수는 다행스럽게도 인기가 좋아, 뉴욕 뿐 아니라 미국 전역, 캐나다, 남미지방에까지 공연을 다녀 공연 수입도 짭짤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 번 공연할 때 1000달러 정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남미에서 두어 달쯤 공연을 하면, 제채비 이외에 5000달러 정도를 만졌다고 합니다. 박인수의 가족이 1980년대 초반에 연간 5만 달러 정도를 생활비로 지출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공연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인수(성악가) 음대 교수로 재직, 향수로 주목받아

 

성악가 테너 박인수

 

그리고 이후 1983년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2003년 퇴임할 때까지 3백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1989년에는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불러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박인수 : "녹음을 한 게 1989년인데 이동원 씨가 찾집에 찾아왔어요. 그래서 향수라는 정지용 시집 전집을 가지고, 저는 그때 부끄럽지만, 정지용이라는 시인이 있는 지도 몰랐어요. 왜냐하면 그때 그분이 납북이 됐기 때문에."

 

박인수 : "그리고 그분이 작곡한 유명한 노래도 이은상 씨가 시를 다시 써서 했던 거거든요. 그래서 향수를 처음 읽어보고, 이 시가 좋으면, 작곡이 좋은 게 붙으면 자기와 노래 같이 할 수 있느냐 해서 보니까 이게 우리 시더라고요."

 

박인수 : "제가 미아리에서 그때 황무지, 네 살부터 살았기 때문에 시골이에요. 논과 밭 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너무 잘 알죠. 그게 마음에 탁 들어와서 그러면 곡이 좋으면 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김희갑 선생님이 그 곡을, 김희갑 선생님은 제가 좋아하는 작곡가니까. 나왔는데 너무 좋아요. 그래서 며칠 후에 바로 녹음했어요."

 

 

박인수 : "저는 사실 향수를 한 것은 시와 노래와 가수도 제가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좋은 노래니까 한 거고, 크로스 오버라든가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접목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좋아서 한 거고, 결과론이에요."

 

성악가 테너 박인수

 

박인수 : "그런데 제가 의도적으로 한 것은 우리 민요와 판소리와 서양 발성법과의 접목이었습니다. 1978년 미시간에서 독주회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들었어요."

 

박인수 : "들어서 그거 어떤 나라 노래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시인이 하고 했으니까 순전히 코리안 곡이다 했더니 좋다, 아름답다 그런데 다 서양음악 아냐, 이러더라고요"

 

박인수 : "그런데 그때 1초에 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충격과 함께, 옳구나, 이게 서양 음악이었구나. 정서는 우리 거지만 순전히 음악은 서약음악이구나. 그래서 우리 것을 알리려고 하면 민요와 판소리 쪽을 그대로 다 하면 안 되니까 우리 맑은 목소리에 접목을 시키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공연 직후 클래식계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모욕했다며 그를 비난하기도 했고, 또 자신이 단장으로 내정되기까지 한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을 당하기도 합니다. 

 

 

박인수 : "사람의 고정관념은 참 무섭죠. 클래식은 대중음악과 다르다는 고정관념이 거셌고, 제가 이에 위배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파문의 중심에 섰던 것입니다."

 

박인수 : "하지만 저를 비난했던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너무 파격이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향수를 부르고 나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성악가로서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고, 사람들의 인생을 다양하게 이해하게 됐습니다."

 

박인수 : "음반이 나온 다음에 저를 제외한 단원 13명이 투표를 했더군요. 제명 찬성이 10표였다고 합니다. 단원에 대한 징계, 제재 권한이 문화관광부에 있어서 일이 커질 뻔했습니다."

 

박인수 :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저를 지지하면서 국립오페라단 해체론까지 불거졌는데, 다행히 수습됐습니다. 나중에 몇몇이 찾아와 분위기에 휩쓸려 투표했는데, 잘못된 일 같다면서 미안해하더군요.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죠. 종교나 다른 분야였으면 쫓겨난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놨어요 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후 4년이 지나 시작된 KBS의 열린 음악회, 파바로티를 비롯한 3대 테너가 주도했던 성악계의 크로스오버 추세가 자리잡힌 것을 보면 선견지명이었던 셈이 되는데요, 아무튼 당시 앨범은 발매한지 7개월 만에 70만 장이나 팔렸고, 이후 2010년 기준 총 130만 장이나 팔리며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됩니다. 

 

박인수(성악가) 향수 음반 판매에 대한 수입

 

성악가 테너 박인수

 

하지만 박인수는 이에 대한 인세는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인수 : "노래를 녹음하면서 계약을 안 했는데 무슨 돈을 받습니까. 인세가 총 13억원이라고 들었는데, 10원 한 푼 안 받았습니다."

 

박인수 : "향수 노래가 나오고, 연말에 이동원씨가 길쭉한 상자 하나를 들고 집에 찾아왔더라고요. 그때까지 인세가 7억원 들어왔는데 그동안 본인이 진 빚을 갚고, 작은 집도 한 칸 마련하느라 돈을 썼다는 겁니다."

 

박인수 :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동원씨가 이제부터 들어오는 인세는 주겠다고 했는데 감감 무소식입니다. 길쭉한 상자 안에 용돈이라도 조금 넣어왔나 싶어 열어 보니, 연어 한 마리가 있지 뭡니까."

 

박인수 : "세상 일이라는 것이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입니다. 인세는 받지 못했지만 유명해졌잖습니까. 제가 향수를 부르지 않았다면 대중에게 성악가가 이처럼 잘 알려질 수 있었겠습니까."

 

박인수 : "향수 덕분에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바람에 공연 수익이 늘었습니다. 오페라 가수만으로 활동하며 올릴 수 없는 수입이죠. 잃고, 얻는 것은 자로 잰 듯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박인수는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매년 50회에 가까운 국내외 공연을 소화했습니다. 

 

<박인수 수상 경력>

-1991년 한국방송대상 성악가상

-1994년 한국방송대상 성악가상

-2011년 은관문화훈장

 

<박인수 경력 사항>

-1983~2003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

-2004.03~2006.03 천안대학교 석좌교수

-2006.03~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백석대학교음악대학원 대학원장

 

박인수(성악가) 결혼 아내 자녀 

박인수는 이미 결혼해 아내와 자녀를 두고 있는데요, 박인수 아내와 자녀 등 가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번에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근황을 알리게 되었는데요, 앞으로도 음악인으로서 좋은 모습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성악가 박인수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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