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현미가 2023년 4월 4일 오전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 씨(73)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합니다.
현미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 판정을 받고 말았는데요, 경찰은 고인의 지병 여부와 신고자, 유족 등을 조사해 정확한 사인을 규명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현미(가수) 본명 나이 고향 가족 혈액형 종교 학력
가수 현미의 본명은 김명선입니다. 현미 나이는 1938년 1월 28일생으로 올해 나이 85세입니다. 현미 고향은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이며, 가족으로는 8남매 중 셋째로 슬하에 아들 두명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참고로, 가수 원준희가 둘째 며느리이고 가수 노사연(현미의 언니의 딸)과, 배우 한상진(현미의 일곱째 여동생의 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미는 혈액형은 O형이라고 하고요, 현미의 종교는 개신교(그리스도의 교회)이며, 학력은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과 명예학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미(가수) 프로필 및 경력
가수 현미는 1957년 미8군 무용수로 데뷔, 이후 현시스터즈로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로 데뷔한 뒤, 1962년 밤안개가 수록된 1집 앨범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후 현미는 주로 이봉조의 곡을 불렀고, 최희준, 한명숙, 이금희, 남일해, 박재란, 위키리, 유주용 등과 함께 60년대 톱가수로 활동, 이미자, 패티김과 어깨를 나란히 한 가수로,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무작정 좋았어요, 몽땅 내사랑 등의 대표곡을 남깁니다.
현미(가수) 집안 가족관계
현미는 8남매 중 셋째로, 1.4 후퇴 때 부모님과 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당시 평양의 집이 망가져 조부모댁에 맡겨진 두 여동생은 피난하지 못하고 북에 남아 조부모 슬하에서 길러졌다고 합니다.
이후 두 여동생과는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될 때 친오빠와 함께 중국 연변에서 한번 만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현미 가족관계를 보면 연예인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예인들이 많습니다.
현미의 첫째 오빠가 현미의 중매를 통해 이시스터즈 김상미와 결혼, 이들의 딸 아일 리가 가수로 활동했고, 현미의 남편은 밤안개, 무인도의 작곡가이자 색소폰 연주자 고 이봉조로 이들의 첫째 아들 고니 역시 가수입니다.
둘째 아들은 가수 원준희와 결혼했고, 막내의 남편은 노사연의 만남을 작곡한 작곡가입니다. 일곱째 여동생은 무용을 전공했으며, 그의 아들이 배우 한상진입니다.
한상진은 농구선수 박정은과 결혼했습니다. 첫째 언니 김화선도 무용수였고 노사연 노사봉을 낳았습니다. 노사연의 남편인 이무송네 가족도 연예계 종사자가 많습니다.
어머니는 성우일과 무용을 했고 이무송의 형 이무창 역시 가수로 이무송과 함께 1983년 대학가요제 어금니와 송곳니들이란 팀으로 활약해 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현미(가수) 데뷔 및 활동
1957년 미8군 위문 공연 무대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 당시 미8군 SHOW 무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현미는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합니다.
그 때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당시 밴드 세션의 마스터)는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으로 음반을 만들어줬고 현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 사실상 데뷔곡이 됩니다.
이후 현미는 1962년 이봉조와 1집을 작업하며 당시 미국의 유명 팝송인 냇 킹 콜의 곡에 현미 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를 발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60년대 대표적인 여가수로 자리매김하며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고, 1965년 김기덕 감독 연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떠날때는 말없이의 주제곡을 불러 연달아 히트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이후 현미는 1968년 이봉조 작곡집 바람을 부르며 또다시 히트작을 내놓았고, 같은 해 보고 싶은 얼굴이란 곡을 발표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표현한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현미는 60년대 초중반에 이어 후반까지도 최고의 스타 반열을 유지했는데요, 특히 이봉조가 해외 국제가요제 출전에 집중하던 때 그리스 국제 가요제에 현미와 함께 출전해 별로 주요부문에 수상하며 국내외 중저음의 허스키한, 강한 성량의 보컬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이에 현미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 취임 파티에 초청받아 한국 대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는데, 인지도가 전무했던 동양인 중년 가수가 미국의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자 연달아 기립박수와 앵콜이 이어져 계획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곡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미는 이후 70년대 후반부터는 가수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이봉조와의 별거로 생활비를 위해 국내 최초로 현미 노래교실을 만들어 연달아 성공하고 또한 예능 출연을 통해 재치있는 입담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실상 이봉조의 유작인 왜 사느냐고 묻거든과 아내(2001)를 발표하며 히트시켜 현미 독자적으로 가수로서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고, 2007년 데뷔 50주년 앨범을 발매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며 한국 최초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현미는 자신은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노래를 부를 생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가요무대 등을 통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특히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주로 외부행사 및 예능 위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미(가수) 결혼 남편 이봉조(?) 나이차, 누구?
그동안 현미의 남편은 작곡가 이봉조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많은 작업을 함께하며 사랑에 빠져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후 이 둘의 관계가 파경을 맞으면서 사실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실제 정식으로 결혼한 적이 없고, 이봉조에게도 본부인인 노전숙이 있었던 것인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현미는 방송에서 결혼과 이혼, 남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봉조(1931년생)는 색소폰 연주자이자 천재 작곡가, 영화음악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로, 1938년생인 현미보다 7살 연상이었습니다.
가수 현미를 비롯해서 최희준, 윤복희, 정훈희 등이 그의 손에 키워졌고, 이후 이봉조 TBS 악단 단장을 역임, 가요계에 큰 영향력을 미쳐 197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미(가수) 유부남인 전남편 이봉조와 결혼한 이유
그런데 현미는 이봉조와 만날 당시부터 이봉조에게 자녀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임신 후 결혼까지 약속한 이후 본처가 찾아와서 본처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미는 이봉조와 결혼식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결혼을 약속하고 시댁에 찾아갔을 때 시어머니라는 분이 참 복스럽게 이쁘게 생겼다면서 가족들 모두가 현미를 좋아해줬고, 또 이봉조는 이혼서류까지 보여주며 현미를 안심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미 : "21세에 처음 그분을 만나 3년 동안 진하게 연애를 했다. 당연히 총각이라 생각했고 이봉조가 아이 둘 딸린 유부남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
현미 : "그러나 임신 7개월이 됐을 때 이봉조의 본처가 찾아와 자신의 남편이 유부남임을 알게 된 것이다."
현미 : "그때 그분에게(이봉조의 본처 노전숙에게) 저는 몰라요. 결혼하자고 해서 청혼을 받았고, 지금 임신 7개월째에요. 결혼하자고 하면 할꺼에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을 너무 가슴 아프게 한거 같아 후회가 된다."
현미(가수) 전남편 이봉조 별거
하지만 이후에 현미는 본처와의 자녀와 자신과의 자녀들의 나이차이 등을 통해 이봉조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관계를 정리하자고 요구했지만 이봉조가 같이 죽자며 칼을 들고 쫓아왔다고 합니다.
이에 현미는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엄앵란 집으로 피했고, 이후 이봉조가 이를 알고 그 곳까지 쫓아와 그 과정에서 신성일과 물리적 다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현미가 관계를 정리하고 본처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몇 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합니다.
현미 : "결혼 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이가 두 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충격을 받고 집을 나왔다. 남편과 헤어지자고 했더니 그럴 바엔 여기서 죽자며 칼을 가지고 들어왔다.
현미 : "이러는데 어떻게 집문서를 가지고 나오겠나. 어떡하면 도망갈 수 있을지만 고민했을 정도로 무서운 위협을 당했다. 아파트 정문에서 숨어있기도 했다."
현미 : "부부사이를 청산하는데 따라 자식들에게 미칠 부작용을 생각해 냉각기를 갖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다."
이봉조와 본처인 노전숙과 현미와 자녀들
사실 이봉조는 노전숙을 1951년에 만나 연애를 했고, 1956년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원래 노전숙은 이화여고를 졸업했고, 이화여대를 진학했지만 6.25 때문에 졸업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이후 1957년과 58년 연년생으로 딸을 낳습니다.(이후 아들과 딸을 한명 더 낳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노전숙은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노전숙 : "둘째딸을 낳았을 때 사람들이 심상찮은 상황을 귀뜸해 주었어요.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고... 물어물어 사무실로 찾아가서 현미씨를 만나서 사정을 했어요. 처자가 있는 분이니 제발 관계를 청산해 달라고요."
노전숙 : "그랬더니 딸만 둘 있으시대죠? 제 일은 알아서 합니다. 그러더니 현미씨가 휙 나가버려요."
그 후로도 노전숙은 여러 번 현미를 찾아가서 애원과 호소를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현미는 이봉조와 더불어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들이 바로 고니(큰아들 이영곤의 가수 예명)와 둘째 아들 이영준이었습니다.
현미가 큰아들 이영곤을 1962년에 낳을 때 본처 노전숙도 아들 이영대를 낳습니다. 그리고 현미가 둘째 아들 이영준을 낳고 후에 노전숙이 막내딸 이지수를 낳게 됩니다.
현미(가수) 전남편 이봉조 이혼(별거) 사유(이유)
아무튼 이봉조는 당시 동시에 두집 살림을 했고, 본처인 노전숙은 남편에게 첩이 있다는 사실을, 현미 역시 이봉조에게 본부인과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동거 생활을 했다는 것인데요, 이후 1974년 현미와 이봉조는 결국 이혼 곧 정확히 별거를 하게 됩니다.
당시 이봉조는 가수 김추자와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났을 때였는데요, 이때 언론에 발표된 것으로는 두 사람은 완전히 이혼이 아니라 별거로 공식 발표가 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언론에서는 이봉조이 본부인이 현미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노전숙이 전혀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당시 이봉조의 여자관계는 현미외에도 복잡했다고 합니다.
현미(가수) 이혼 이후 생활과 이봉조의 사망 이후
현미는 그렇게 이봉조와 이혼(별거) 이후 어린 두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목에서 피를 토할 정도로 노래하며 야간업소를 전전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정작 두 아들이 커가는 모습은 지켜보지도 못했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이후 현미는 시누이가 이봉조의 사망 직전 건강이 악화되어 꼭 한번만 찾아가 봐달라는 연락을 받고 이봉조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봉조의 모습은 이가 다 빠지고 상당히 심각한 상태임에도 본처와의 재결합을 거부하고, 틀니를 낀 상태로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서로 오열했다고 합니다. 이에 다시 재결합을 약속했지만 이봉조는 1987년 심장마비로 급사하게 됩니다.
현미 : "별거에 들어가면서 남편에게 본처에 들어가 살라고 했지만 들어가지 않고 13년간 홀로 살았다. 남편을 찾아갔을 때는 당뇨로 수척해져 이후 남편에게 반찬도 해주고 방문했다."
현미 : "그 잘생긴 사람이 말라서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는데 날 안 받아줄 거냐 (하더라고요) 내가 다시 모실 거니까 건강하게 살자고 그랬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헤어지지 말고 더 이해하면서 살았으면 좋았을걸...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참고로, 이봉조는 생전에 본처와의 합장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후 본처 자식들의 요구와 현미측의 배려로 본처와 합장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내막은 후에 신성일과 같은 연예계 동료나 기자들에게 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봉조의 본처 노전숙과 아이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봉조가 죽은 뒤 노전숙 가족이 전격적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하게 되면서 이 모든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노전숙 가족이 인터뷰를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영숙(이봉조의 큰 딸) : "영대(이봉조 노전숙의 아들, 서울대 법대 재학중 사법시험에 차석 합격)가 고시에 합격한 후 연수원에서 연수를 받는데, 동료 한 사람이 그러더래요. 너희 엄마 가수지?"
워낙 이봉조와 현미 커플이 유명했기에 사회 생활을 하는 이영대가 자칫하다가 자신의 어머니가 바뀔 위기에 처해지게 된 것인데요, 이에 결국 아들 가족이 어쩔 수 없이 나서서 내막을 밝힌 것이라고 합니다.
현미(가수) 아들 가족 건강 남자친구 근황, 사망
한편, 이후 방송을 통해 미국에서 살고 있는 현미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지병을 물려받아 심근경색, 당뇨로 오랫동안 병원을 다니고 있는 상황에 매일같이 두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던 현미가 여든 살 생일을 맞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는데요, 이후에도 종종 여러 방송을 통해 근황을 전하고 있네요.
지난 8월 TV조선 건강면세점에 출연해 수술 받고 회복한 근황을 전하며, 최근 12세 연하 남자친구와 8년째 연애 중임을 밝혀 화제를 모았던 현미인데요, 현미는 얼마 전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미는 2023년 4월 4일 오전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하고 말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상 가수 현미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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