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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탁 나이 집안 과거 프로필 아내(부인) 자녀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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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겸 록 음악가 김홍탁이 8월 26일 KBS 가요무대에 출연합니다.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추억 등의 노래로 1960~1970년대를 풍미한 우리나라 최초의 록 밴드 키보이스의 리더였던, 조용필이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칭했던 김홍탁입니다.  

 

이에 김홍탁 나이 프로필 아내 자녀 근황 등 관심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록 음악가 김홍탁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모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김홍탁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학력 

 

김홍탁

 

대한민국 1세대 기타리스트이자 록 음악가(작곡가) 김홍탁은 1944년 5월 13일생으로 올해 나이 80세입니다. 김홍탁 고향은 경기도 인천(제물포)이며, 이외에 김홍탁 키 혈액형 가족 종교 학력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습니다. 

 

 

* 윤항기 <나이 집안 부인(아내) 아들 윤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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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도균(가수) 프로필 나이 노래 가족 근황,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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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탁 집안 과거 

김홍탁의 아버지는 창영초등학교를 나왔고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법원 공무원으로 일했던, 책과 공부와 음악을 좋아했던 분이었고, 아버지보다 4~5년 아래인 김홍탁의 어머니 역시 창영초등학교 출신으로 결혼 전까지 곱게 자란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김홍탁은 해방 직전인 1944년 경기도 인천(제물포) 내동에서 태어나 6살 때까지 살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져 할아버지의 고향인 영종도로 피난을 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피난 과정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잠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 합니다. 김홍탁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영종도로 피난을 나온 것입니다.

 

법원 공무원인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끌려갔고 어머니는 집을 지켜야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김홍탁의 아버지는 1.4후퇴가 지나서야 인천의 한 경찰서에서 식물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참고로, 김홍탁의 조부는 영종도에서 금을 채취하는 사업을 한 김종헌씨로, 김홍탁에 따르면 조금 과장하면 영종도에서 그의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니지 못할 정도의 거부였고 만석꾼 소리를 들으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김홍탁 : "우리 할아버지가 금광을 크게 하셨던 사업가였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고, 그런데 나는 이른바 딴따라를 했으니 3대가 다른 길을 걸었다."

 

아무튼 김홍탁은 그렇게 영종도로 피난가 할아버지 집에 머무르며 전쟁이 끝난 뒤 초등학교를 마치고 영종도에 중학교가 없는 탓에 송현동으로 이사와 동산중학교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홍탁의 모친은 불구나 다름없는 남편을 돌보며 중앙시장 인근에서 집안 어른들이 3층짜리 건물을 마련해 주어 지물포를 운영해 생계를 책임졌다고 합니다.

 

김홍탁 음악에 눈을 뜨게 된 계기

 

김홍탁

 

그러다가 김홍탁이 중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의기소침해진 아들이 안쓰러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기타를 선물, 그때부터 김홍탁은 기타와 한 몸처럼 붙어살았다고 합니다. 

 

 

김홍탁 :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5남매의 장남인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기타를 사주셨다. 미국으로 유학 간 삼촌도 기타를 보내주셨고. 그때(중 2)부터 기타와 한 몸처럼 붙어살았다."

 

기타의 음색에 매료됐던 김홍탁은 눈만 뜨면 기타를 잡았고, 밥 먹을 때조차 기타를 안은 채 숟가락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친구로부터 우연히 기타를 잘 친다는 한 미군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게 됩니다. 

 

김홍탁 : "로큰롤을 배우고 싶었는데 인천엔 당시 트로트와 클래식 기타 학원만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는 아니었는데 자기 집 2층에 미군이 살고 있고 그가 기타를 친다는 거다. 그래서 찾아갔는데 기타소리가 제게는 천지개벽처럼 들리더라."

 

김홍탁 : "2층에 세 들어 사는 미군이 연주하는 기타소리였다. 그 리듬이 무척 좋은 거다. 기타를 가르쳐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는데 처음에는 제가 너무 어리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찾아갔다."

 

김홍탁 :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미군 병사가 미국에서도 꽤 유명한 프로 뮤지션이었다. 이래저래 운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김홍탁은 결국 그 미군에게 1년 조금 넘는 시간을 일요일마다 찾아가 기타를 배웠고, 이후 착실하게 기타 연습을 하며 연주자로서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김홍탁 본격적인 음악 활동 시작

 

김홍탁

 

그러다가 동산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학교 동기 선배 등과 함께 캑터스라는 5인조 밴드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당시 김홍탁이 막내였음에도 밴드의 리더를 맡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들은 방과 후 신포동의 한 건물 지하창고 연습실에 모여 연습했고, 악보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시기였기에 유일하게 악보를 옮길 수 있었던 김홍탁이 다른 한 멤버와 함께 경쟁이라도 하듯 킹스턴 트리오, 브라더스포, 피터 폴 앤 머리 등의 빽판을 들으며 오선지에 채보했다고 합니다.

 

 

미8군 라디오 방송도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김홍탁은 그때 경험이 내 음악적 귀를 만들어 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이후 이들은 일주일에 한 차례 신포동에 있는 미군만 드나들 수 있는 클럽 무대에서 연주도 하게 됩니다. 

 

김홍탁 : "신포동 일대에 미군만 출입이 가능한 클럽이 적어도 4~5곳 이상은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친척에게 밴드를 구한다는 얘길 듣고 오디션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합격했다."

 

당시에는 특히 미군기지 주변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클럽이 많았는데 김홍탁의 캑터스와 같은 국내 밴드와 가수들에게는 이들 무대가 자연스럽게 음악적 내공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다가 김홍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윤항기가 멤버로 있던 서울 키보이스의 차중락으로부터 키보이스에 합류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동산중학교 시절 동창 가운데 하나가 서울에 있는 경복고등학교로 진학했고, 키보이스 멤버이자 경복고 출신 차중락에게 김홍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 인연이 된 것입니다. 

 

김홍탁 키보이스 합류하며

 

김홍탁

 

김홍탁은 그 길로 키보이스에 합류, 당대 엘비스 프레스리로 불린 보컬 차중락, 베이스 기타 연주자 차도균, 드러머 윤항기, 키보드 옥성빈 등이 모인 키보이스는 1963년부터 준비에 들어가 1964년 7월 국내 최초 록밴드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후 국내 팬들에게는 키보이스로, 미8군 무대에서는 락앤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미8군 무대에서 키보이스는 데뷔 후 단 한 차례도 AA 등급을 놓치지 않았고, 첫 히트곡 정든배를 필두로 전국의 미군 부대를 누비는 동안 한국의 비틀즈로 불리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김홍탁 : "예를 들면,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에서 공연을 자주 했는데 공연이 끝나면 절대 앞문으로 나가질 못했다. 목에 스카프라도 걸치고 있으면 여성 팬들 극성에 찢길 정도였다."

 

김홍탁 : "서울 변두리 극장도, 지방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아침에 유명해진다는 얘기가 있다. 우리가 그랬다. KBS 방송 출연까지 거절할 정도로 바빴다."

 

당시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키보이스는 유명세 덕분에 야간통행증을 발급받는 특혜까지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김홍탁의 마음 한편엔 늘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홍탁은 결국 1967년 지미 헨드릭스의 하드 록에 충격을 받고, 키보이스를 돌연 해체하게 되는데, 최정점에 있는 키보이스를 대중에게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김홍탁 히파이브와 히식스를 거쳐 

 

김홍탁

 

이후 김홍탁은 1968년 조용남(기타)의 추천으로 한웅(키보드), 유영춘(보컬), 김용호(드럼)와 함께 히파이브(He5)를 꾸려 활동을 시작, 1970년 해체되기 전까지 초원, 꿈꾸는 사랑, 헤이 쥬드 등으로 인기를 끌게 됩니다. 

 

김홍탁은 이후 1970년 히파이브를 해체한 뒤 다시 6인조 히식스(He6)를 결성, 1970년 1집 창작 타이틀곡 초원의 사랑을 발표, 히파이브가 팝송 번안곡이나 외부 작곡가 곡을 위주로 했던데 반해, 히식스는 김홍탁 자신의 자작곡 중심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히식스는 1970년 7월 제 2회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키보이스를 누르고 우승했습니다. 이해 후반 김용중 대신 명지대 3학년이던 최헌을 영입, 1971년 히식스와 함께 고고를 이라는 음반을 내기도 했지만 1972년 돌연 미국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역시 음악을 향한 끝없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김홍탁 : "록 음악의 본고장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김홍탁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근황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낮엔 사업을, 밤엔 이스트웨스트란 밴드의 리더로 살아가는 삶을 꾸려나갔고, 15년 뒤인 1987년 귀국, 이후 꼼꼼한 준비 끝에 199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용음악 고등교육기관인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세우게 됩니다. 

 

서울예대조차 클래식과만 있었던 시절,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나라 실용음악 교육을 정착시키는 대가로 건강이 악화돼, 서울재즈아카데미가 자리 잡은 2009년, 퇴직과 함께 건강을 위해 양평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의 소원은 고향 인천에서 멋진 공연을 한번 여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지난해(2023) 11월에는 음악인생 60주년을 맞아 양평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김홍탁 수상 경력>

-2017년 제 14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김홍탁 히트곡>

-해변으로 가요, 초원의 사랑, 물새의 노래, 당신은 몰라, 사랑의 상처 등

 

김홍탁 결혼 아내 자녀 

김홍탁은 이미 결혼하여 아내와 자녀를 두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다만, 김홍탁 아내와 자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번에 가요무대에 출연하게 된 김홍탁인데요, 앞으로도 좋은 모습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김홍탁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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