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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항기 <나이 집안 부인(아내) 아들 윤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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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항기 <나이 집안 부인(아내) 아들 동생 윤복희>

 

<동치미 윤항기 부인(아내) 정경신 손주들과 캠핑>


 

가수 윤항기 부부가 9월 12일 MBN 동치미에 출연한다고 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 윤항기는 아내와 손주들과 캠핑을 하러 나갔습니다. 윤항기는 시작부터 가방을 엎는 대형사고를 쳤는데요, 윤항기 아내는 "내가 못 한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느냐"라고 화를 냈습니다. 

 

 

윤항기는 엘리베이터에서도 짐에 고집을 부렸는데요, 윤항기 아내는 "내가 이래서 가고 싶겠냐고"라며 짐을 정리하다 짜증을 냈습니다. 윤항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했고, 윤항기 아내는 "맨날 알아서 한대"라며 성질을 냈습니다. 

 

 

윤항기 부인은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당신이 다 알아서 해"라고 잔소리했습니다. 이에 윤항기는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할테니까"라며 큰소리를 쳤습니다. 윤항기 부인은 "아까도 알아서 한다더니 안 된다니까 왜 고집을 부리느냐"라고 타박했고, 

 

이어 '나는 안 되는 걸 아는데 당신은 왜 고집을 피우느냐. 나이 먹더니 고집이 더 세졌다"라고 화를 냈습니다. 이에 윤항기는 "사돈 남 말 하네. 당신은 안 그런 것 같으냐"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가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했고, 아내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윤항기는 휴게소에서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요, 윤항기 아내는 라면을 먹고 싶어 했지만 윤항기는 "이 더운 날에 무슨 뜨거운 라면이냐"라며 라면을 먹고 싶어하는 아내의 취향을 무시했습니다. 

 

윤항기는 "아까 라면 먹고 싶었다고? 아까?"라며 냉면을 다 먹고 나서야 아내 눈치를 봤는데요, 윤항기 아내는 "됐다"라고 말했고, 윤항기는 "라면 먹을래?"라고 말하며 아내를 약올렸습니다. 이에 윤항기 아내는 "빨리 먹고 가자"며 한숨을 내쉬었는데요, 

 

윤항기 부부의 반전 일상의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네요~~^^ 오늘은 윤항기의 나이 고향 학력 결혼 부인(아내) 자녀 등 윤항기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모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윤항기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학력 집안 과거, 데뷔 및 활동, 동생 윤복희 목회자가 된 이유, 폐결핵, 결혼 부인(아내) 정경신 나이 직업 아들 주노>


 

-윤항기(가수), 윤항기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학력

 

가수 윤항기는 1943년 9월 15일생으로 올해 나이 78세입니다. 윤항기 고향은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보령이라고 하구요, 윤항기 가족으로는 아버지 윤부길과 어머니 고향선, 누나 윤수현, 여동생 윤복희, 그리고 부인(아내) 정경신과 슬하에 1남 4녀를 두고 있습니다. 

 

 

윤학기의 학력은 연세대학교 종교음악학과 학사, 미국 미드웨스트 신학대학교 신학과 학사,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음악학과 음악학 석사,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신학 석사, 신학 박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항기(가수), 윤항기 집안 과거

 

윤항기 아버지는 현재 서울대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 제 1회 졸업생으로 성악과 작곡을 전공하고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라고 하는데요, 한국 현대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예술가 고 윤부길(1912-1957)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윤항기 여동생 윤복희는 그 유명한 뮤지컬 배우 윤복희이구요, 아들인 주노(본명 윤준호)는 CCM 음악 가수로 현재 CCM 음악 보컬 그룹 큐브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윤항기는 어릴때부터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노래는 커녕 극장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고 하네요. 암울한 시대, 신산한 예술가의 삶을 아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요, 

 

하지만 윤항기의 타고난 끼는 어쩔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성경자라는 본명보다 고향선이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 악극계 스타였다고 합니다.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였던 어머니는 일본 유학시절 아버지를 만나 라미라가극단에서 함께 활동했었다고 합니다. 

 

윤항기는 유년시절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런 날이면 여지없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합니다. 윤항기는 이후 아버지의 마약 중독으로 인한 생존의 극한 점에서 어머니마저 악극단 지방 공연 중 심장마비로 객사하는 비통함을 겪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성장기는 온통 피눈물로 얼룩졌다고 합니다. 마약에 빠진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까지, 행복했던 가정은 파탄나고 어린 남매는 청계천 길거리로 내몰리는 신세가 됐다고 하네요. 그러한 어려운 환경에서 그를 이끌어준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고 합니다. 

 

-윤항기(가수), 윤항기 데뷔 및 활동

 

윤항기는 1959년 작곡가 김희갑이 악단장으로 있던 에이원쇼 를 통해 미 8군 쇼에서 데뷔했다고 합니다. 이후 윤항기는 1960년 8월 해병대 병 110기로 입대하여 군악대 사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후 윤항기는 1964년 대한민국 최초의 록 음악 밴드라고 할 수 있는 키 보이스를 결성해 그해 독집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 를 발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앨범은 국개 그룹사운드의 첫 번째 앨범으로 알려졌는데요, 1960년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가 트로트였던 것에 반해 윤항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생소한 음악 스타일인 그룹 사운드를 했었답니다. 

 

윤항기를 주축으로 결성된 록 음악 밴드 키보이스는 1963년에 결성된 전설의 5인조 그룹으로, 윤항기가 드럼을 맡고, 일렉 기타는 김홍탁, 보컬이 유희백, 키보드와 베이스는 옥성빈과 차도균이 담당했던 국내 최초의 록밴드였다고 합니다. 

 

당시 키보이스는 해변으로 가요(1969년)라는 노래를 전국적으로 히트시키며 60-7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고 합니다. 윤항기는 이그룹의 주축 멤버였다고 하네요. 

 

 

윤항기는 한 인터뷰에서 "대단했죠, 그때 인기는 요즘 아이돌 가수 못지 않았어요. 키보이스는 60년대 젊은이들의 해방의 분출구였어요. 신중현씨가 만든 에드 포와 양대 산맥을 이뤘죠. 연고전보다 열기가 더 뜨거웠을 거예요."

 

"보통 라이벌이 아니었거든요. 대학 축제나 쎄시봉 등에서 연주 활동을 하면서 여학생 팬들이 부쩍 늘어났어요. 나중에 해변으로 가요 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전국구 스타가 됐죠"라고 했습니다. 

 

이후 윤항기는 키 브라더스를 거치며 그룹 사운드 생활을 하다가 1974년 솔로 가수로 데뷔했는데요, 이후 윤항기는 별이 빛나는 밤에 장미빛 스카프, 이거야 정말,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어떡하라고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습니다. 

 

 

 

 

 

 

 

윤항기는 1975년에는 영화 나는 어떡하라고의 주연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이후 윤항기는 1986년 웹컴투코리아를 마지막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가서 신학을 공부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답니다. 

 

-윤항기(가수), 윤항기 목회자가 된 이유, 폐결핵

 

이렇게 윤항기는 여동생 윤복희와 함께 60-70년대 대중음악의 기틀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요, 이렇게 부와 명예를 한손에 거머쥐며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그가 하루 아침에 목회자가 됐다는 소식은 당시에도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윤항기는 "78년에 폐결핵에 걸려 쓰러졌어요. 폐결핵 말기라 약도 없었죠.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였고,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어요. 그때 아내와 여동생의 권유로 하나님을 믿게 됐고 기적적으로 완쾌됐어요"

 

"기적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요. 당시 한참 사경을 해맬 때 병만 낫게 해주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겠다는 서원 기도를 했거든요. 다시 활동을 하면서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결국 86아시안게임을 끝으로 과감히 접었죠"라고 했습니다. 

 

결국 윤항기가 고민끝에 선택한 길은 목회자의 길이었다고 합니다. 윤항기는 86년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한 뒤 90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뒤에도 윤항기에게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결국 신앙의 힘은 아버지와 세상에 먼저 손을 내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윤항기는 이후 음악으로 많은 이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어 음악신학원(현 예음종합예술원)을 설립하고 교단(현 에장예음)까지 세웠답니다. 

 

 

 

윤항기는 이에 대해 지난 2018년 한 인터뷰에서 "이 나이에 은퇴를 하고도 다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감사하죠. 어떤 목표를 갖고 분명한 목적 의식으르 갖고 일을 하는 자체가 나름의 건강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정신이 건강해지니까 자연히 육체적인 건강도 따라오는 것 같더라고요"라고 했습니다. 

 

-윤항기 결혼 부인(아내) 정경신 나이(차) 직업, 결혼스토리

 

윤항기는 부인(아내) 정경신과 1973년 결혼했는데요, 윤항기는 부인(아내) 정경신을 윤항기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한 여학생으로 만났다고 합니다. 윤항기 부인(아내) 정경신은 당시 숙명여대 가정과 1학년 학생이었다고 하네요. 

 

 

 

윤항기는 "내가 키보이스로 활동할 당시에 아내는 내 공연때마다 따라다니던 열성팬이었다. 나 역시 아내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그런데 아내의 집안은 당시 광산업을 하던 유복한 가정이었고, 우리의 교제를 반대했었다. 그래서 아내의 외출을 막기 위하여 처가에서 머리카락을 몽땅 잘라서 집안에 가둬두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윤항기 부인(아내) 정경신은 "당시 키보이스가 인기가 많았지만, 젊은 친구들 위주였고 어른들은 잘 모르셨다. 그래서 부모님은 남편을 그저 딴따라로만 생각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윤항기 부인(아내) 정경신은 집에서 탈출을 했고, 두 사람은 이태원 여인숙에서 신접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윤항기는 "가족으로부터 축복받지 못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기에 아내가 마음 고생, 육체적인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첫 아이를 낳은 뒤 두 사람은 1973년에야 처가의 인정을 받고 정식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윤항기 부부는 딸 4명에 아들 1명을 낳아 윤항기 부부 자녀는 딸 4명, 아들 1명이 있다고 합니다. 

 

 

-윤항기 부인(아내)의 헌신적인 간호

 

윤항기는 "베트남 위문 공연을 할 때 한번은 폐결핵에 걸려서 귀국하기도 했다. 한때 볼링에 미쳐서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빚을 얻어 재산을 탕진할 때도 있었다. 또한 밤마다 유흥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끝나고 나면 주변 사람들과 밤새 진탕 놀았다"고 했습니다. 

 

 

윤항기는 마약 중독자였던 아버지를 미워했고 그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갔다고 합니다. 또한 윤항기는 폐결핵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기도 했다고 하네요. 

 

윤항기는 "인기 가도를 달리던 1977년 가수왕 기념 축하 공연장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당시에 의사가 폐결핵 말기라며 6개월도 살기 어렵다고 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런 나를 살린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당시 폐결핵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났다. 병원도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주사법(주사기 사용법)까지 배워서 나를 간호했다. 아내 덕분에 내가 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윤항기 부인(아내) 정경신은 "남편이 때로는 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가장 좋았던 모습은 가요를 시작하기 전에 미 8군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이었다. 당시 남편이 레이 찰스 노래를 참 잘했다"

 

 

"나중에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할 때도 있었지만 레이 찰스 노래를 들으면 그때 윤항기가 미 8군에서 활동하던 시기가 생각나고 남편에 대한 미운 감정이 해소됐다"고 했습니다. 

 

 

결국 6개월 시한부 인생이었던 윤항기는 아내의 간호로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고 이후 종교적으로 귀의하여 음악 목사로 활동하기까지 하게 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윤항기는 "내 재능을 살려 음악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었다. 전국의 교회를 다니면서 음악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1990년에 미국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사실 아버지를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목사 안수 받으면서 용서할 수 있었다.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되는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윤항기 목회자의 길에서 다시 가수의 길로

 

1986년 미국으로 훌쩍 떠나 신학도가 된 그는 현지 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돌아와 국내 최초로 음악목사가 됐는데요, 1990년 음악신학교를 세우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던 윤항기는 30년간 목회라는 한 우물만 팠다고 하네요. 

 

(참고로, 윤항기는 예음종합예술원 학장,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 예음교회 담임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음악학과 겸임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음악학과 강사를 역임한 바 있습니다)

 

 

이후 윤항기는 음악 목사로 25년동안 활동하다가 정년 퇴임한 다음에 다시 가수로 컴백, 2015년 데뷔 55주년 기념 음방 걱정을 말아요를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이 노래는 윤항기가 직접 작사 작곡하고 아내 정경신이 작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이후 윤항기는 지난 2017년 완전 좋아 딱 좋아 라는 신곡도 내고 콘서트도 여는 등 여느 가수들과 다를 바 없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답니다. 

 

-윤항기 윤복희 여러분

 

하지만 목회자에서 다시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로 컴백한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고 하는데요, 이에 대해 윤항기는 "내가 전에 만든 곡의 사연을 알면 그렇지 않다. 여러분이 대표적이다. 이 곡은 나와 동생 복희가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가슴으로 쓰고 부른 노래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MBC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불러서 화제가 됐었는데요, 실제로 이 노래는 윤항기가 기적적으로 완쾌된 뒤 지은 노래라고 합니다. 실의에 빠진 여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녹여내 만든 이 노래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그랑프리(대상)를 수상했습니다. 

 

 

그해 6월 20일 지구레코드에서 발매된 서울국제가요제 실황 앨범 자켓에는 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후 윤복희 윤항기 남매가 격렬하게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극적인 모습이 담겨 있답니다. 

 

 

실제로 1979년 6월 2일 MBC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주최한 제 2회 서울국제가요제에는 세계 12개국을 대표하는 18명의 가수들이 나와 치열한 경연을 펼쳤는데요, 한국 대표로 출전한 윤복희는 오빠 윤항기가 작사 작곡한 여러분을 불러 영예의 그랑프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수상 직후 윤항기는 "윤복희가 외로울 때면 위로해줄 사람은 누구? 바로 여러분!"이란 인사를 건넸고 윤복희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앵콜송을 부른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폐결핵 말기 선고를 받고 절망 속에 몸부림 치던 윤항기는 자신의 동생 역시 이혼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여러분을 작곡했다고 하네요.

 

윤항기는 "여동생(윤복희)이 20살 어린 나이에 결혼에 한번 실패했고, 또 1977년 가수 남진과 재혼했지만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그때 동생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만든 곡이 바로 여러분이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윤항기는 동생을 위로하는 노래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도 용기와 힘을 실어주고자 만든 오래였던 것입니다. 

 

윤항기는 "어느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레마로 성경 구절을 들려주셨어요. 그게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인데요,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라고 시작하는 말씀이었죠. 그 맗씀을 받고 깊이 묵상하면서 그 곡을 쓰게 된 거죠. 종교적인 말로 얘기하자면 제가 만든 곡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그 곡을 쓰도록 만드신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윤항기 여동생 윤복희

 

윤항기 여동생 윤복희는 1946년 생으로 올해 나이 75세로, 윤항기보다는 3살 아래라고 합니다. 윤항기, 윤복희는 지난 2018년 말 남매가 나란히 사요무대에 출연하게 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요,

 

 

윤항기 동생 윤복희는 첫 남편 유주용과 1968년 결혼해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떠났지만 1975년 파경을 맞았다고 합니다. 윤복희는 과거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유주용이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평범한 주부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남편이 일을 그만두고 내 매니저가 됐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윤복희는 톱가수 남진과 스캔들이 터지며 남편과 멀어졌다고 합니다. 윤복희는 남진과 스캔들이 보도된 신문을 건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남편뿐인데 나약해진 남편에게 서운했다"며 스캔들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남편이 너무 예민해졌다"고 이혼에 이르게 된 뒷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이후 윤복희는 1976년 스캔들의 주인공 남진과 결혼했지만 결혼 3년 만에 다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윤복희는 이에 대해 "제가 이용했죠. 남편(유주용) 보라고 그 남자를 이용한 거예요. 고백한 사람의 순진성을 이용한 거죠"라며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었다면 이용한 거죠. 그분에게 굉장히 미안했어요"라는 충격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윤항기 아들 내외 합가 (이유)

 

윤항기는 현재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에 대해 윤항기는 지난 8월 방송된 동치미에서 "저희 아들은 조그만한 대학교 실용음악학과 교수다. 월급이 많지 않아서, 아이들을 낳고 나서 살림이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됐는데, 걔들은 관리비, 생활비도 없다"고 입을 열었습니다. 이어 윤항기는 "저는 아예 며느리에게 생활비 카드를 줬다. 손주들 학원비도 매달 따로 보태준다. 대신 최대한 매달 저축해서 나중에라도 독립하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벌써 13년째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 풍금(가수) <나이 학력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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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가수) 가수 풍금이 가요무대에 출연한다고 합니다. 풍금은 지난해 10월 가오무대에 출연해 흑산도 아가씨로 뜨거운 반응을 얻은 바 있으며, 또한 지난 2월에도 출연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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