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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전설 이봉걸이 9월 11일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근황을 전합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방송 최초로 80년대 씨름으로 지금의 아이돌급 인기를 누렸던 이만기, 이봉걸, 이준희, 모래판의 3이가 감격의 상봉을 합니다.
추석을 맞아 명절 때마다 전 국민을 열광케 했던 모래판의 황제 천하장사 이만기가 마이웨이에 등장합니다. 이만기는 그와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씨름의 인기를 한층 높여 주었던 이봉걸, 이준희와의 만남에 나섭니다.
80녀대에도 이 세 명의 만남은 볼 수 없었는데 은퇴 후 35년 만에 방송 최초로 만난 이만기, 이봉걸, 이준희는 그동안 어디에서도 공개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치열했던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3명의 씨름 레전드는 뭐든 잘 먹을 것 같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우승을 놓친 일화, 판정 불복종으로 3천만원의 돈을 지불한 수모 등 현역 시절 비하인드 스토리를 화끈하게 고백합니다.
또한 이제는 지팡이 없이 걷기 힘들다는 이봉걸 선수의 안타까운 근황은 물론 약 20년 만에 샅바를 차본다는 이준희 선수의 가슴 뭉클한 순간까지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은퇴 후 처음으로 샅바를 잡고 대결을 펼친 이만기와 이준희의 진풍경도 펼쳐집니다.
한편, 천하장사 이만기의 전설적인 씨름 인생 이야기도 공개됩니다. 이만기는 "부모님 곁에서 농사를 지을 뻔한 어린 나를 안타깝게 여긴 큰형이 부모님 몰래 마산으로 전학을 보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씨름을 만났다"고 씨름과의 운명적인 인연을 밝혀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만기는 씨름 은퇴 후 종합격투기 K1에서 10억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해 시선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봉걸(씨름)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키 혈액형 종교 학력
레전드 씨름선수 출신 이봉걸은 1957년 2월 28일생으로 올해 나이 66세입니다. 이봉걸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이며, 가족으로는 아내와 슬하에 아들 2명을 두고 있습니다.
이봉걸은 키 205cm에 몸무게 135kg, 혈액행은 B형이라고 하고요, 이봉걸 종교는 유교(성리학)이며, 학력은 대구영신중학교, 대구영신고등학교, 충남대학교 사법대학 체육교육과, 한남대학교 지역개발대학원 사회과학 석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봉걸(씨름) 과거
이봉걸은 어렸을 때부터 키가 크고, 힘이 세 별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69년 대구 영신중 입학과 함께 유도에 입문해 주로 대구시청 뒤 유도회관에서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는 영남대 유도선수가 운동하러 다녔는데 키(176cm) 때문인지 툭하면 아직 13살 밖에 안된 이봉걸을 붙들고 기술 가르쳐 준답시고 수시로 누르고, 조르고, 꺾어대는 바람에 결국 무지막지한 조르기에 세 차례나 기절하고 석 달 만에 낙향해 버렸다고 합니다.
시골서 자란 순박한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받았던 것인데요, 깜짝 놀란 어머니가 떡까지 해 대구로 데려가줬지만, 이틀 만에 또 내려갔다고 합니다.
이봉걸 : "도저희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농사지었죠. 뭐. 이듬해엔 영양읍내 제과점에 취직해 제과 제빵 기술을 배웠습니다. 급식 빵을 만들던 큰 빵집이었어요. 거기서 한 2년 정도 일하다 다시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바깥바람을 쐰 터라 이봉걸에게 시골은 답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와 둘이서 집을 뛰쳐나가 인근 마을에서 멀리 도망갈 경비 마련을 위해 두 달만 머슴살이를 하기로 하고 풀도 베고, 나무도 하고, 추수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달포 만에 아버지에게 끌려갔는데, 하지만 이미 허파에 바람 잔뜻 든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봉걸 : "열흘 후에 소 판 돈 300원을 훔쳤습니다. 친구는 고추 두 근을 팔았고요. 자장면 한 그릇 40원 할 때니까 큰돈은 아니었어요. 돈 많으면 게을러진다고 집에서 조금씩만 가져오기로 했거든요."
그리고는 좀 멀리 묵호항으로 가 생선 리어카를 끌었다고 합니다. 한데 비린내 때문에 이틀 만에 두 손 들고 제 발로 귀가했다고 하네요. 이후 세 번째 도망처는 태백. 거기서 석탄 화물차 보족사로 또 몇 개월 보냈고, 역시 중도 하차해 낙향했다고 하비다. 그 후 4H 활동으로 가마니도 짜고, 그 힘들다는 담배 농사도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엔 영덕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 특수 작물 재배도 하고, 양봉업자 따라다니며 벌을 쳐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6년을 방황하다가 결국 다시 운동으로 방향을 잡고, 당시 대한체육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영신중 시절의 억울한 사연과 함께 196cm에 94kg이다. 운동하고 싶다는 내용도 담았다고 합니다. 그 편지는 경북체육회 사무국장에게 전달되었고, 올라오라는 연락이 와 계성고 갈까, 영신중에 편입할까 고민하다가 영신중을 택해 1학년으로 떠난 지 6년 만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봉걸 : "동기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어 있었죠. 친구들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술집에 가야 했어요. 저 때문에 대학생들이 빵집에 갈 수는 없잖습니까. 사복을 입어도 삭발이라 번번이 제지당했지만, 그때마다 주민등록증 보여 주고 들어갔죠. 중 3때 당당하게 술집 드나든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이봉걸(씨름) 선수 경력
이봉걸은 그렇게 중학교 재학 시절인 1970년에 씨름에 입문해 고 2때 이미 전국대회를 제패할 기회가 많았지만 선배들로 인해 일부러 져주곤했다고 합니다.
이봉걸 : "고 2때 전국대회를 제패할 기회가 많았지만 일부러 안 했습니다. 선배들을 처박으면 학교에 돌아가 박살 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넘어져 줬습니다."
하지만 이후 더 이상 선배가 없는 고 3시절이 왔고, 1978년 4월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진 협회장기 대회에서 7전 전승으로 우승했고 그해 가을 진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기 장사급 8강 리그에서 또 당시 통산 9승을 노리던 최고 장사 김성률을 눕히며 우승하여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봉걸은 그때의 승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성률을 은퇴하게 만든 것인데요, 이후 큰 키를 탐낸 농규계의 권유에 방열 감독 밑에서 잠시 농구로 외도하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고 씨름판에 복귀, 프로 씨름 출범 이후 럭키금성 황소 씨름단 소속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이봉걸이 모래판에 등장하면 그 자체로 화제가 되곤 했는데, 당대 씨름판에서 두번째로 큰 선수가 188cm의 이준희였으니 누구와 싸우건 다윗과 골리앗의 구도가 되어 이봉걸에겐 큰 부담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외모와 달리 이봉걸의 성품이 매우 순박하고 선해서 투쟁심과는 거리가 멀어 큰 키와 엄청난 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 큰 신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씨름에 매진한 결과, 1986년 백두장사, 천하장사 대회 결승에서 연달아 절대강자로 군림하던 황제 이만기를 꺾으며 첫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 시기부터 이만기를 위협할 수 있는 강자로 이준희와 함께 빅3의 위치에 오르게 된 이봉걸의 씨름에 위협을 느낀 이만기는, 이때부터 105~108kg이던 체격을 123~115kg 수준으로 벌크업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이봉걸에 대항하게 됩니다.
이에 절대강자 이만기에 대항하는 늦깎이 거인 이봉걸에게 성원을 보내는 시선이 많아져 이봉걸과 이만기의 결승전이라도 벌어지면, 9시 정규 방송을 뒤로 미루고 중계를 계속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9시 뉴스 중에도 진행을 멈추고 속보로 결승 실황을 보도할 만큼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만기와 이봉걸의 천하장사 결승전은 역대 씨름 중계 최고 기록 68%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강호동이 대단한 선수이긴 했지만 이봉걸에게는 유난히 약해 공식적으로 총 4번 붙어서 모두 이봉걸이 이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워낙 거구에다 이미 30줄에 접어들어서는 짧은 전성기를 보낸 후 부상과 복귀를 반복했고, 결국 1990년 설날 천하장사대회를 목전에 두고 다리의 인대가 파열되어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되어 은퇴하게 됩니다.
이봉걸(씨름) 은퇴 이후 활동
은퇴 이후 영화 돌아온 우뢰매(1992년)와 드라마 두 형사에 출연하기도 했던 이봉걸은 대전씨름협회 전무이사, 대덕대학 겸임교수, 충청대학 겸임교수, 경남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씨름연맹 상벌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에는 대전지체장애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이봉걸은 이후 2005년 12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이듬해인 2006년 제 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전광역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낙선했습니다.
이후로도 이봉걸은 열린우리당 스포츠문화예술행정위원 직위에 재직하다가 2007년 3월을 기하여 열린우리당 스포츠문화예술행정위원 직위 사퇴 및 탈당했습니다.
이후 2007년 5월까지 한 달 간 민주당 스포츠문화체육행정특임위원 직위를 역임하였으며, 그해 12월까지 대통합민주신당 스포츠문화체육행정특보위원 직위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소속 정당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이봉걸은 2009년 에너라이프 타이거즈 씨름단의 창단과 함께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기도 했는데요, 현재는 명절 장사전 등에서 비디오 판독관으로 모습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봉걸(씨름) 허리 디스크 협착 수술
한편, 젊었을 때 고된 반복 훈련으로 연골이 세 번 찢어지고, 인대가 두 번 끊어져 다섯 번째 수술에 들어간 이후 4개월이나 병원신제를 졌는데도 회복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아 은퇴를 했던 이봉걸인데요, 이후 약해져 있던 허리 디스크가 악화하면서 2014년 초부터 하체에 가벼운 마비 증상까지 오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실패한 사업을 마무리 하느라 병원 치료를 미뤄 병을 키운 탓에 나중에는 아예 걷기 조차 힘들 정도로 상태가 악화가 되었고, 여기에 설상가상격으로 당뇨까지 겹치면서 수술일정이 더욱 미뤄져 결국 10월이 되어서야 척추 뼈 3개를 교체하는 디스크 협착 수술을 받으며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이봉걸 : "2006년 대전시의원 선거에 낙선하고 2009년 시작한 사업까지 실패하면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어려워졌다."
이에 농구선수 출신인 미국인 씨름거인 커티스 존슨이 병문안차 깜짝 방문해 자신의 출연료를 병원비로 주기도 하는 등 여기저기서 격려금 전달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봉걸(씨름) 아내 자녀 근황
이봉걸은 이미 결혼해 아내와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봉걸 아내와 자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번에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지팡이 없이 걷기도 힘든 근황을 전하게 된 이봉걸인데요,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오래 활동하는 모습 보고 싶네요.
* 추천 글 -> 이만기 <프로필 나이 아내(부인) 한숙희, 누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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