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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 <나이 학력 남편 근황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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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 <나이 학력 남편 근황 이주일>



<하춘화 밥은 먹고 다니냐>



데뷔 60주년을 앞둔 하춘화가 SBS플러스 밥은 먹고 다니냐에 출연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4월 13일 방송에서 하춘화는 1961년 만 6세에 데뷔, 60여 년의 다사다난 했던 가요사를 풀어놓았는데요, 김수미는 하춘화에게 "국민 가수라는 호친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며 월남전 위문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춘화는 18세에 전쟁 중인 베트남에 갈 수밖에 없던 사연을 밝혔는데요, 당시 하춘화는 병사들의 보고 싶은 연에인 앙케트 1우에 뽑혔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전시 상황에 미성년자인 딸을 보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의 부름에 결국 베트남에 갔고 포탄 소릭 들려도 공연을 감행했다고 하는데요, 하춘화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우리 군인들, 오늘 죽을지 모르니까 좋아하는 연예인과 사진 찍은 걸 정말 좋아했다. 참전 군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뽑혔다"


"그때 아버지가 국방부에 호출됐다. 나이가 너무 어려 위문 공연을 거절했더니 국방부가 설득했다. 그곳에 대한민국의 아들들이 있는데 위문 공연이 그렇게 어렵냐고 묻더라. 그래서 미성년자라 보호자 동행을 요청했다. 대학생이던 언니가 보호자로 따라갔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하춘화는 "한 달 있었다. 비둘기 부대, 백마 부대, 천룡 부대를 다 돌면서 공연해야 했다. 공연 중에도 포탄소리가 들렸다. 자다가도 깼다. 안심 시키는데도 무서웠다"


"그리고 군예대 위문단에 이주일이 있었다. 무명이던 그를 만났다. 먼저 귀국하니 대신 안부전화 해주겠다고 해다. 못생긴 사람이 친절하구나 싶더라 전화번호 주고 귀국하니 이주일이 전화했다더라. 그때 인연이 시작됐다"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하춘화는 코미디언 고 이주일과의 애틋한 사연도 밝혔는데요, 월남전 위문 공연에서부터 시작된 고 이주일과의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하춘화 프로필 나이 키 몸무게 혈액형 종교 고향 학력 데뷔 및 활동 이주일과 인연 전남편 이혼 남편 자녀 근황 >



-하춘화(가수), 하춘화 프로필 나이 키 몸무게 혈액형 종교 고향 학력


하춘화의 본명은 하춘화이구요, 하춘화 나이는 1955년 6월 28일생으로 올해 66세입니다. 하춘화 키는 162cm, 몸무게 50kg, 혈액형은 A형이라고 하구요, 하춘화 종교는 천주교로 세례명은 체칠리아라고 합니다. 




하춘화 고향은 전라남도 영암군이라고 하는데요, 이후 부산에서 잠시 살다가 광주광역시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서울로 상경했다고 합니다. 


하춘화 학력은 서울수송초등학교, 정화여자중학교,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경남대학교 병설 산업 전문대학 가정학 전문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 학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예술철학 박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춘화(가수), 하춘화 당시 최연소 가수로 데뷔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하춘화는 그녀의 나이 7살 때인 1961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해에 데뷔했다고 하는데요, 



하춘하는 처음 데뷔했을 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답니다. 물론 지금도 인기는 변함이 없다고 하는데요,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남자 가수로서 레전드가 조용필이라면 여자 가수로서 레전드는 하춘화였다고 하네요. 




하춘화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하종오에 의해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요, 거기서 하춘화는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고 난 뒤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TV는 사랑을 싣고에 따르면 하춘화는 한때 최연소 가수로 데뷔와 앨범 발매를 해서 기네스북에 오른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얼마 안 있어서 마이클 잭슨이 5살의 나이로 데뷔함으로서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하춘화는 오늘 방송에서 "6살 아이가 대중가요 발표한 건 최라 외신들이 취재왔다. 역도산이 한국을 방문해 만났다. 일본으로 데려사거 키우겠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라고 해서 아버지가 반대했다. 일본인이 되는 건 싫다고 해서 무산됐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이어 하춘화는 "제 첫 무대는 당시 제일 큰 극장이었다. 독집 앨범에 12곡을 담았다. 발표한 노래만 2500곡 정도 된다. 신곡 연습할 시간도 없이 다음 앨범을 제작했다. 작사 작곡이 끝나면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몇 천 곡의 노래를 발표한 건 나훈아, 이미자. 하춘화 셋 뿐"이라고 자랑했습니다. 



-하춘화 데뷔 후 활동 경력


이후 하춘화는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 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는데요, 음반은 1971년에 처음으로 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음반 노래인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고, 


1971년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 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다수였던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을 했습니다. 



-하춘화 이주일과의 인연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다고 하는데요,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애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다고 하네요.


이후 하춘화와 이주일의 인연은 10년간 이어졌다고 하는데요, 하춘화는 "1977년 리사이틀 하는데 전속 사회자를 모집했다. 공고를 보고 이주일이 찾아왔다. 단장님이 너무 못생겼다고 불합격시켰는데 제가 오디션을 보자고 했다. 탈선 춘향전 공연을 하는데 이주일이 너무 열심히 하더라. 전속 계약을 맺고 10년간 함께 공연을 돌아다녔다. 제 8500회 공연 중 7500회는 그와 함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면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 뒤 하춘화는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할 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이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에 하춘화 역시 이주일을 평생 은인으로 여겼으며 2002년 이중일이 사망했을 때도 당연히 빈소를 찾았다고 하는데요, 장례식 때 조시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너무 가슴에 사무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하네요. 



하춘화는 "이리역과 제 공연장은 500미터 거리였다. 그런데 화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했다. 위력이 엄청났다. 이리시 전체의 유리를 깨뜨렸다. 1977년 11월 11일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라. 땅속으로 떨어지는 공포가 느껴졌다. 이리시 전체가 암전됐다. 공연장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고 아픈 기억을 끄집어냈습니다. 


그러면서 "나 혼자 살아 나가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이주일 목소리가 들렸다. 암흑 속에서 나는 많이 다친 것 같아요 하더라. 전쟁이 난 것 같으니 빨리 나가자고 했다. 나무 하나가 걸려 있는데 그걸 타고 올라가더라. 담장 위로 가서 뛰어내리락 했는데 못하겠다고 했다. 결국 이주일의 머리를 딛고 내려왔다. 머리 위로 벽돌이 떨어져서 두개골 함몰 부상을 당했는데도 몰랐다. 이주일이 내 생명의 은인이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하춘화 학업을 위해 은퇴 복귀 활동


이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업 및 결혼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는데요, 하지만 1981년 다시 가수로 복귀해서 우리 사랑 가슴으로, 연인의 부르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 



하춘화는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상대방에게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때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습니다. 


하춘화는 "1985년 그때만 해도 김일성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동포, 민족보다 적진에 가는 기분이었다. 벌벌 떨며 갔다. 고려호텔에 묵었다. 자유로운 개인 행동은 불가능했다. 방 앞에 안내원이 지켰다. 방 안에서 대화도 자유롭게 못했다. 녹음기 틀어놓거나 필담했다. 3박 4일 긴장과 초조한 마음을 지냈다."고 조심스럽게 회상했습니다. 



하춘화는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 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1991년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습니다. 


하춘화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오늘 방송에서 "기록을 내려고 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 최다 콘서트 보유자가 되었다. 8500회 정도 된다. 1년에 절반을 공연했다. 리사이틀 한참 할 땐 하루 공연 2-5회였다. 최대 10시간 공연이었다"


"한 공연에 8가지 무용, 노래 30곡을 했다. 등창난다고 땀 때문에 등이 곪았다. 사춘기도 못겪고 성장했다. 친구들과 떡볶이 먹고 짜장면집도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중 3 때 첫 히트곡 물새 한 마리가 나왔다.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 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이로서 하춘화는 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한때는 예능에서 소녀시대 춤을 추기도 했답니다. 


또한 하춘화는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었지만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나이야 가라 등 신곡을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학업은 계속해서 병행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는 2018년 발표한 마산항에 비가 내린다 라는 노래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춘화 학력 학위


하춘화는 공연과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학업에도 열중하여 1994년에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 최고 정책과정을 수료한 후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하춘화는 2000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공연예술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2006년 8월 25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가수가 되었답니다. 



하춘화는 현재 학사 3개, 석사 1개, 박사 1개로 학위를 5개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 가수 중에서는 가장 갯수가 많다고 합니다. 방송통신대학교 시상식에서 시상소감으로 말했던 것은 자매가 넷인데, 다른 자매와 달리 혼자 박사학위 없이 가수로 생활하다보니 학위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네요.


-하춘화 결혼 전남편 이혼 재혼 남편 나이(차) 직업


하춘화는 1981년 첫번째 결혼식을 올렸으나 10개월 후 이혼을 했다고 하는데요, 하춘화 전남편은 정운창씨로, 직업은 사업가였다고 합니다. 하춘화의 이혼사유로는 공식적으로는 성격차이라고 하네요. 



하춘화는 이후 10년 동안 솔로로 지냈는데요, 이후 1995년에 지금의 남편 이인순씨와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요, 중매로 만났다고 하네요. 하춘화 남편 이인순 씨는 하추노하보다 4살 연상이라고 하구요, 하춘화 남편 직업은 기획조정실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춘화 남편 이인순 씨 두 사람은 각각 38살과 42살 때 재혼을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하춘화는 결혼(재혼) 후 자녀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방송에서 하춘화는 "결혼 25주년이 됐다. 누군지 모르고 만났다. 국장 언니가 진국이라고 해서 봤는데 와이셔츠 안에 검정 러닝셔츠를 입었더라 너무 별로였다. 1년 만에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났다. 12월 31일 호텔에서 만나자더라"며 남편과 러브스토리를 들려주기도 했는데요, 



하춘화는 사실 신혼 초에 임신을 한 적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하춘화가 유산을 한 뒤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춘화는 이후 입양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하춘화는 "순리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노력을 많이 했다. 이미 나에게 많은 걸 주셨으니 자식은 안 주시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더 걱정하더라, 큰 불행, 결점인 것처럼 얘기하더라. 입양도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다. 그런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했다"고 털어놨ㅎ습니다. 



하춘화는 남편 이인순 씨에게 항상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요, 워낙 인기스타이다보니 바쯘 스케줄로 인해 가정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옆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춘화 200억 기부, 봉사활동, 근황


하춘화는 과거 방송된 SBS 희망TV에 출연해 자신의 봉사 활동에 따른 신념을 고백하기도 했는데요, 이날 하춘화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국경, 이념을 초월해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의무"라며 "그들을 돕는데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라며 소신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하춘화는 "나눔 실천은 생활 속에서 항상 함께 해야 하며, 돈이 많아서 돕는 게 아니라 평소의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여서 꾸준히 나눈ㅁ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봉사활동의 기본 정신을 고백했습니다. 


하춘화는 하춘화는 2011년에는 56살의 나이로 데뷔 50주년을 맞아 하춘화와 함께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이 콘서트에서 벌려 들인 200억 원을 불우 이웃 돕기에 기부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는데요, 하춘화는 지난 40년 동안 무려 300억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춘화는 이에 대해 "부모님께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았다"라며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라는 소신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춘화는 "40년 전 서울 집값이 300만원이었는데 공연 수익금 1-2천만원을 기부했다. 기부 액수를 묻길래 어림잡아 200억원 대충 얘기했는데 더 될 수도 있다"며 


"제가 1세대인 황금심, 백설희, 현인, 김정구 선생님들과 한 무대에 섰다. 아버지가 그 자료들을 다 모으셨다. 먼 훗날 공공기관에 기증해서 대중문화의 연구 자료로 주고 싶다 하셨다. 전남 영암군에 기증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를 건립했다"고 알렸습니


하춘화의 목표는 신인가수를 발굴할 트로트 아카데미 건립과 90세가 될 때까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춘화는 지난해 2019년 6월 5일 채널A 행복한 아침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근황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오늘 또 밥은 먹고 다니냐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네요. 


하춘화는 또 오늘 방송에서 김수미를 만나자 대뜸 "조인성을 저한테 양보해 달라. 김수미가 한 방송에서 녹화 날 조인성이 대기실 앞에서 연인처럼 배려했다고 자랑하셨다. 굉장한 질투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김수미는 "집문서를 주더라도 조인성은 안된다. 조인성이 결혼해도 내 마음은 변치 않는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는데요, 이에 하춘화 역시 조인성은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춘화는 "잘생기기만 한 남자는 싫다. 조인성은 잘생겼는데 남자답다"고 치켜세웠습니다. 김수미는 "발리에서 생긴 일 때 조인성이 내 아들 역이라고 인사하는데 하느님이 강림한 줄 알았다. 내가 제임스 딘을 좋아하는데 조인성은 그 느낌이 난다"고 자랑했습니다. 


하춘화 역시 "저도 발리에서 생긴 일 때부터 좋아했다"며 수줍게 미소지었습니다. 김수미와 하춘화는 조인성의 혈액형, 키, 심지어 팬티 사이즈에 대한 퀴즈까지 맞히며 엄청난 팬심을 뽐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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